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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진열장/대한민국

1948년 김구의 행적을 알아보자...

by JiNan's 2019.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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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좀이나 선동된 사람들이

김구가 대통령 되었으면 통일 대한민국이 되었을거라는

망상을 하지만 해방후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면 그럴일은 결코 있을수 없었다. 

가장 명백한 것이 절대군주 스탈린이

단독정부 수립을 명령한 것을 천하의 김일성도 거부할수 없었는데 
무슨수로 김구가 바꿀수 있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1948년 무리한 행보를 보였다.
이승만을 상당히 자극하고 우익계에게 분노와 실망을 안겨주는 행보를 보였다. 

좌파들은 김구의 좌우합작을 매우 높게 평가하지만
그당시 공산주의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임시정부 법통론을 부정하고 나왔고

여운형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허헌은

김구를 포함하여 임시정부 법통론을 대놓고 부정했다.

▲김일성 대학 총장까지 지낸 허헌

 

공산주의 사회주의 진영은 김구를 적대시 하면 적대시 했지

김구를 추대하거나 한반도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남북 연석회의는 한국을 흔들 목적으로

김구를 선전 도구용으로 이용한것이지

김구의 민족 통일론에 동조할 목적이 아니였다.  

남북 연석회의 관련 북한발 기사에 나온 김구에 대한 평가글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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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타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민주세력과 정면대립하였는가 하면

모스크바3상 회의결정이 전해졌을 때에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리승만과 쌍벽이 되여 《반탁》운동을 주도하면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그의 휘하에 있던 우익세력은 그의 이름을 빌어 횡포한 백색테로까지 감행하였다.

그것은 당시 북조선인민위원회 서기장이였던 강량욱목사의 아들, 딸들이

그를 추종하는 테로단에 의하여 살해당한 사실에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사태로 하여 그는 당시 《테로의 두목》으로 불리울 정도로 민주세력,

특히 북의 인민들에게서는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해방전 《림정》에서 활동할 때에도 그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테로를 서슴지 않았다.

그의 영향하에 《림정》과 기맥이 통하고있던 동북의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가는 청년들을 살해까지 하였던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해방전부터 화해할수 없는 반공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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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 성시백의 포섭활동에 넘어가

일체의 신변보장을 약속하자 넘어가는 장면의 기술은

김구가 마치 김일성이라는 개새끼에게 항복하러 간것처럼의 묘사라 생략한다.   

대부분의 좌좀들이나 선동된 사람들은 김구의 단정론에 대해서

스탠스가 일정한것처럼 보이지만 오락가락이였다.
  
1947년 11월 30일 단정론 찬성 
1947년 12월 3일자 경향신문 1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클릭 ▶ 三領袖意見一致(삼영수의견일치) 金博士(김박사)도
南朝鮮總選擧(남조선총선거)를認定(인정) 
今後問題(금후문제) 結合(결합)의方式(방식)뿐

장덕수 암살사건 이후 김구의 입장변화   
문제는 장덕수 암살(1947.12.02)사건 이후로 장택상은 김구를 체포까지 하려했고

미군정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고 조사하자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김구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김구의 성향이 완전히 변해 버린다.

 

▲미군정 재판 증인 심문에 참석한 김구

 

이후부터 김구는 건국진영에서 완전히 이탈을 해버리고

이상한 컨셉을 잡고 반공주의적 성향을 가졌던 김구가 돌변하여

북한에 우호적인 입장을 계속 표명한다.  

변화의 결정판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1948년 2월 11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이라는 성명서로

좌좀들은 오오미 진정한 민족주의자 운운하는데

사실상 성명서는 장덕수 암살사건 이후

자신은 단정에 협력하지 않을것임을 분명히 했던 최종성명서 였던 것이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최종버전이 나오기 이전에도

비슷한 주장을 했고

1948년 1월 김구의 주장에 대해서도 우익계는 상당한 우려를 보였다.

1948년 1월 30일 동아일보 
클릭 ▶撤兵(철병)과南北會談說(남북회담설)은
蘇聯主張(소련주장)을代辯(대변)  
金九氏民族陣營離脫(김구씨민족진영이탈)?
金九氏談話(김구씨담화)에 對(대)한各界反響(각계반향)

 

방북한다 한들 남북통일이 가능했을까?

1948년 건국전 한국은 우익계의 의견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좌익계들의 단정수립 방해공작(대구폭동, 제주폭동, 여순반란) 이라는

혼란을 겪고 있었고 북한은 정식 오픈 이전에 행정기구,토지개혁,군대 구성까지 끝났었다.

소련 스티코프,레베데프 관리감독하에 정부구성 요건을 완료 해놓은 상태였다.

 

 

▲ 1948년 2월 8일 인민군 창설(국가보다 먼저 군대를 창설하는 위엄)

 

스탈린의 명령에 단독정부 구성을 한국보다 먼저 완료하였으며

자신의 입지를 견고하게 구축한 김일성이였고

1948년도에 김구는 현실적으로 북한에도 한국에도

자신의 영향력을 상실한 정치인이였던 것이다.

김구의 커다란 실수는 방북이였다. 

우파 관점에서 볼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해방 전후사를 바라볼때

우익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북연석회의로 방북하고

나이어린 피래미 새끼 뒤로 따라가는 김구의 행보를

진정한 민족평화 통일론자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까?

독립 운동시절에도 빨갱이 때려잡았던 김구선생이 왜 북한으로 넘어갔을까?

김일성을 폭사시키려고 한 백의사 단체의 배후 인물이 바로 김구인데 말이다.

그리고 간과할수 없는 사실은 방북한 4월에 제주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난리통 유혈 폭동이 일어난 상황에서 김구는

지지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담을 넘어서  방북을 했다.    

과수원 앙망썰,임시정부 옥쇄? 기증썰이

정말 북한 주장대로 사실이라고 한다면 쉴드불가 수준의 부역질을 한거다. 

 

하지만 북한측의 일방적인 주장임으로 진실은

북한이 멸망한 후에 알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북후 김일성에게 완전히 농락당한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한 김구 스스로도

적어도 4월경에도 남북통일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레베데프 비망록으로 남북연석회의도 소련의 기획임이 드러났고

김구와 김규식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완전히 이용 당한것이다.

19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
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출처: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2970187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민족분단을 막기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1948년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南北)지도자연석회의와 김구(金九).김일성(金日成).김규식(金奎植).김두봉(金枓奉)등 남북정치지도자들의 회담이 소련측의 주도면밀한 각본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관계기사 8面〉 이같은 사실들은 中央日報가 창간 30주년사업으로 추진중인 현

news.joins.com

 

▲김구를 포섭하는 방북공작을 수행했던 초대형 거물 스파이 성시백 (6.25 남침전쟁때 뒤짐)

 

1948년남북협상과관련된 북한의대남정치공작 - 양동안(한국학중앙연구원명예교수) [한국 국가정보학회 논문]
http://www.kanis.or.kr/kboard/file/02-%20%BE%E7%B5%BF%BE%C8.pdf

 

성역화된 김구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자.

 

김구의 장덕수 암살사건 이후 1948년 행보는

그냥 건국에 반대하는 수준이였다.  

남북 연석회의 참여를 가지고 진정한 민족 통일 지도자라고

존만한 좌파들이 쭉쭉 빨아재끼지만

유어만 대화록을 보면 충격 그자체다.

1948년 7월 11일 유어만 총영사와의 회담록을 아는 좌파들도 없고

산업화가 덜된 조선(국)뽕 조차도 이승만의 대안이 존재했고

그 대안이 김구라고 착각한다.

이승만은 이를 알고도 김구에 대해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것을 보면

대인배의 면모도 엿볼수 있다.

유어만 대화록을 요약하자면  
김구는 단정에 협력하지 않을것을 분명히 했고

심지어 북한이 어떤짓을 벌일지 확신이 있음에도 침묵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과 함께 발표한 4.30 공동 선언문까지 종합해서 보면

김구는 해방이후 대한민국 건국기여 업적이 단 1도 없다고 평가를 한다.

미군정 하지는 남북연석회의 이후

깊은 빡침으로 반박성 특별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48.05.06동아일보1면
 南北協商要請書(남북협상요청서) 共產黨陳情書(공산당진정서)로 看做(간주)

미군정 하지가 진심으로 빡치게 한것은

바로 김구&김일성의 남북 공동성명서 내용임을 알수있다.

김구의 실수 01

1948. 04.30 남북 공동 성명서 내용 (김구 김일성 공동성명)
1.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외국군대는 우리 강토로부터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이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2. 남북 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외군이 철거한 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들 大 정당·사회단체들 간에 성취된 약속은 우리 조국의 완전한 질서를 수립하는 튼튼한 담보이다.

3.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下記 제 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권과 정치·경제·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첫 과업으로서 일반적·직접적·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통일적 조선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기관은 조선헌법을 제정하며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全文임).

4. 남조선 단독선거는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며, 
이 성명서에 서명한 정당·사회단체들은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1948년 4월30일 공동 성명서 내용도 충격이지만
유어만 대화록까지 곁들여서 보면

당시 김구가 얼마나 심각한 행보를 보였는지 알수있다.

 

 

김구의 실수 02

▲유어만 중국공사와 김구와의 대화록


김구는 방북의 목적을 유어만 중국(자유중국)공사에게 밝혔는데 
그는 북한의 차후 행보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나
이러한 사실을 함구했으며 오히려 남북 공동성명까지 발표 했다.

 

출처 번역문 - http://chogabje.com/board/view.asp?C_IDX=62384&C_CC=AZ
영  문 - http://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119630

 


후반부 발췌

Kim: Do you think that China will be the very first nation to recognize the South Korean Government?
김구: 귀하는 중국이 한국을 인정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Liu: I am not in a position to assure you of that. But I have no doubt that China,
America and England will do so simultaneously at the earliest possible opportunity.
유어만: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국, 미국, 영국이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그렇게 할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Kim: Don't you think it possible for America to back down?
김구: 미국이 (지금 입장을) 물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Liu: Impossible, for the American people is solidly backing Korean independence.
유어만: 불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미국인들이 한국의 독립을 확고하게 지지하니까요.

Kim: One of the motives for going to the Leaders Conference was to see the actual things happening in North Korea. Even if the Communists stop expanding the Korean Red Army for three years to come, all the efforts in South Korea will hardly be able to build up an army to the present strength of the red army. The Russians will easily set it on its southward swoop without incurring the blame for the moment a government is set up here, the People's Republic will be proclaimed.
김구: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南進하는 데 써 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Liu: It will not happen unless Russia means war which she doesn't. In the past Russia reconciled twice before international coercion, once from Korea and the other time from the Laotung [Liaodong] Peninsula. Probably she will do so again under the impact of the roused world opinion working through UN. If the government now being set up is to be an American puppet just as the northern regime is a Russian one, I could easily understand your stand to collaborate with neither. With UN backing, it will be a sovereign one, a base to win union from. The weaker you find it, the more unreserved should be the weight you throw in.
류어만: 러시아가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과거에 러시아는 두 번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한국으로부터, 또 한 번은 요동반도로부터 물러났습니다. 유엔을 통하여 세계 여론이 일어나면 러시아는 그 충격 앞에서 다시 굴복할 것입니다. 여기서 만들려고 하는 정부가, 북한정권이 러시아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미국의 꼭두각시라면 나는 선생께서 어느 쪽과도 협력하지 않으려 하는 입장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유엔의 지지 덕분에 한국 정부는 主權국가가 될 것이고, 통일을 성취할 基地가 될 것입니다. 선생께서 한국이 약하게 보일수록 선생께선 조건 없이 (建國을 위하여) 투신하셔야 합니다(끝).

 

 

 

 

출처: 1948년 김구의 행적을 ARABO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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