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큰 공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이승만에 대해 조금 아는 사람이나 보통 사람들은 서슴지 않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확실하게 대한민국 안보의 핵심이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래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6.25 전쟁 당시 미국은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 특성을 감안하여 한국을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는
전초기지로써의 역할을 수행시키기 위해 이승만이 아니었더라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을 것이다.>
왈가왈부 하지 않고 팩트로 이 터무니 없는 주장을 박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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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나의 논문을 소개하려 한다.
200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외교학 석사학위로 제출한 논문인
김남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 연구 : 동맹의 제도화를 통한 동맹 딜레마의 관리」이다.
링크는 http://dcollection.snu.ac.kr/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36392
1950년대 당시 한미관계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한 연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세가지가 있다.
Stephen Jin-Woo Kim, Master of Manipulation: Syngman Rhee and the Seoul-Washington Alliance,
1953-1960 (Seoul: Yonsei University Press, 2001)
차상철, 『한미동맹 50년』
유영익,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하지만 위의 것들은 단점이 하나 있는데
당시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한국의 전략적 상황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고민에 대한 분석이 상세하지 못하고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이승만의 업적은 분명하고 사실이었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승만의 입장에서 주로 서술하다보니
상대국인 미국의 입장이 다소 부족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한미동맹의 전반적인 구조에 대해 분석적으로 서술을 하는 논문은 두 편이 있다.
양대현, 「한국전쟁과 한미동맹관계 : 동맹이론을 중심으로」
김일영, 「이승만정부의 북진, 반일정책과 한미동맹의 형성」
하지만 위의 두 논문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의 원인 분석에서
'미국의 이해관계 입장' 분석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처음 이야기한 논문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이승만의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미국의 이해관계에 있어 아이젠하워를 포함한 미국의 정책결정자 들의 인식에 좀 더 주목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발효가
어떠한 과정과 원인에 의해 이루어졌는지를
실증적으로 분석하여 보다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저 논문을 바탕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 수 있었던게 왜 이승만이었고
또 이승만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인지 조약의 체결 과정을 토대로 하여 분석해보자.
그리고 읽을 때에는 본문 내용 다 읽을 필요 없다.
빨간색 밑줄 친 것만 읽고 밑에 정리하여 쓴 글을 읽으면서 읽어나가면 되겠다.
1953년 전쟁 발발 3년 후 참전국인 미국은 슬슬 이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경제적인 부담으로 비판 여론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53년 미국의 아이젠하워는 당선 공약 중 하나로
'한국전쟁의 평화적인 정전협정'을 내걸고 당선이 된다.
아이젠하워가 당선된 후 미국은 정전협정의 체결을 위해 박차를 가하게 된다.
하지만 정전협졍 체결을 위한 과정 증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이승만이 정전협정 체결 전에 미국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달라고 요구를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여전히 한반도에는 중공군이 남아있고
이를 해결짓지 않은 채 정전협정을 맺는다면
미군과 유엔군이 철수 후 공산주의자들이 내려와
한반도를 공산화 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선 당장 상호방위조약은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한반도에 많은 경제 원조와 안보를 위해 지원을 하니
굳이 명시된 조약이 필요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반도에 중공군을 냅둔 채로
정전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다시 한 번 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요구사항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한국은 독자적으로 북진을 감행할 것이라 주장했는데 이는 미국에게 위협을 안겨주었다.
그 이유는 2년 동안의 정전협정이 평화적으로 마무리 단계를 밟아가고 있는 와중에
이승만이 단독으로 북진을 한다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한국에 있는 미군의 안전 또한 보장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미국 정부는
한국이 독자적인 북진을 내세우며 주장하는 조약 체결을 거부하며
한반도의 중국군 잔류 또한 정전협정에서 논의될게 아니라
정전협정 이후 열리는 정치회담에서 논의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승부사의 기질을 보이며 이때부터 미국과 쇼부를 치기 시작한다.
이승만의 북진론은 미국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앞에서 말했다 싶이 정전협정이 파기 됨은 물론이거니와
주한 미군의 안전이 자칫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에버레디 계획 개요" 라는 계획을 세워
이승만이 단독으로 북진하면 한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한반도에서 실행할 사항들을 작성한다.
미국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은데 한국이 요구하는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주자니
빠른 정전협정에 방해가 되고
(방위조약 맺어주면 이승만이 그거 믿고 단독 북진 강행할까봐
이만큼 이승만은 미국에게 계산할 수 없는 어려운 존재였다)
그렇다고 빨리 정전협정을 마무리 짓자니
이승만이 지 멋대로 유엔 탈퇴하고 또 북진할까봐
즉 방위조약 못 맺는 이유도 이승만의 단독 북진,
정전협정 못 맺는 이유도 이승만의 단독 북진
결과적으로 이승만은 미국에게 유엔을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북진을 감행하겠다는 카드를 내밀어 딜을 건 것이다.
5월 12일 이승만과 사령관 클라크는 면담을 하는데 반공포로에 관한 운을 띄운다.
당시 포로를 중립국을 자처하는 인도로 보내는걸 반대하며 석방을 주장한다.
(당시 인도는 명맥상만 중립국이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
클라크는 동맹국들도 동의할 것이나 단독으로 포로를 석방하는 일은 있어선 안된다고 말한다.
5월 22일 아이젠하워는 다시 한 번 현 상황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못 박는다.
5월 25일 사령관 클라크와 주미대사 브리그스는 이승만을 다시 만나는데
이승만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반공포로 석방에 관련해서 이견을 보였으며
당시 사령관과 주미대사는 이승만이 포로 석방을 할 가능성을 캐치하고
본국에 이승만이 단독으로 반공 포로 석방의 용의가 보인다며 보고를 올린다.
29일 미국에선 클라크 사령관의 보고서를 토대로
국무부와 합참의 종합 회의가 열린다.
여기서 미국의 입장이 바뀌는데 바로 이승만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조약이라는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결과는 30일 대통령에게 보고가 되고
아이젠하워는 이전에 한국에게 상호방위조약은 불가능하다고 확답하였으나
이제 상호방위조약 협상을 제안하는 것을 허락한다.
다만 조건이 있었는데
이승만에게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는 정전협정에 협조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금한다는 약속이었다.
같은 날 30일에 이승만은 아이젠하워한테 편지를 보낸다.
편지의 내용은 이전과 같았으나 이를 본 미국 관료들은 이승만이 이전보다 부드러워졌다고 평가한다.
이 편지와 이전 날 합참-국무부 회의를 토대로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을 진행하자고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문제는 상호방위조약의 협상 날짜였다.
아이젠하워는 일단 정전협정을 빨리 끝내고 싶었기에
정전협정 이후 논의를 하자고 말한 것이었다.
미국이 이전과 달리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꾼 계기는
바로 정전협정을 방해하는 이승만의 단독행동
즉 ①반공 포로 석방과 ②단독 북진 감행 등이었다.
그래서 빠른 정전협정을 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의 협조가 필요했는데 상호방위조약이라는 이승만의 딜을 수용하는대신
이승만의 협조를 원했던 것이다.
정전협정이 한창 진행되던 떄에,
공산주의 측은 포로가 원하는 경우에는 중립국으로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이승만의 입장에선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항이었다.
위에서 설명했다싶이 중립국은 공산주의의 영향을 다분하게 받고 있어서
반공 포로가 중립국에 간다 해도 사상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정전협정에 계속해서 반대하고
미국이 상호방위조약 협상을 언급해도 무반응으로 대한 것이다.
이승만은 끈질기게 반공 포로 석방에 관해
중립국이나 사실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인도를 의식하며
정전협정에 반대 의사를 내비친다.
하지만 미국은 이승만이 사실상 정전협정을 받아 들일 수 밖예 없다고 판단하여
6월 18일 정전협정의 체결을 앞두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은 18일 새벽 반공포로를 석방하는데 그로 인해 정전협정 체결은 무산된다.
바로 이승만은 미국에 자신의 입장을 전달한다.
단독으로 반공 포로를 석방하여 미국이 그토록 원하던 정전협정 체결을 무산시켰으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미국에 상황을 악화시키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말한다.
미국은 곧바로 국가안보회의에서 이승만에게 분노한다.
아이젠하워는 "친구 대신 또 다른 적이 나타났다고 했으며,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면 그것을 인정할 수 있다"고
표명한다.
하지만 미국도 반공포로를 자유롭게 해주는 방법이 석방 말고는 없단걸 인식하고 있었고,
5월부터 그 가능성에 대해 인지하였기 때문에 큰 문제를 야기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 사태를 통해 이승만은
미국에게 미국에 협조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단 위협인식을 강화하게 된다.
이승만은 강경책과 온건책을 상황에 따라 취함으로써 사람을 다루곤 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정전협정에 관한 요구사항은 단호히 주장했다.
이때 이승만은 정전협정 이전에 상호방위조약의 완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조약의 비준은 상원을 거쳐 의회의 비준을 받아야 하는데
개원이 내년 1월이라 기다려야 하니 미리 초안은 작성할 수 있다 하여 초안을 작성한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미국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에 동의한다.
미국은 NSC(국가안전보장회의) 154, 154/1, 156/1, 157/1를 승인하며
한국 대응 전략을 정하는데 한반도의 입지 중요성을 인정하며 상호방위조약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승만이 정전협정에 대해 협조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협조 아래 미국이 원하던 정전협상이 7월 27일자로 체결되었고
미국은 약속한대로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임할 것을 밝히며 초안을 작성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승만은 초안을 강력한 어조로 작성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미국은 상원의 지지를 받기 위해선 강한 어조로 작성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이승만과 덜레스는 다섯 차례에 걸친 회담을 가지며 초안을 작성하면서
여러 이견이 있었으나
대표적으로 한국이 공격을 받을 시에 미국이 자동 참전할 것을 주장했지만
한국 문제에 소극적인 미 상원으로부터 승인받기 위해서는
이를 '자동' -> '헌법 절차'로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이 초안은 8월 7일에 발표되고 10월 1일 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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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과정을 살펴보았는데
최대한 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 개인적인 의견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서술해봤다
흔히 이승만이 아니었어도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맺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건 단호하게 큰 오산이다.
미국이 당시 한반도의 중요성을 인식했단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승만이었기에 조약을 체결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데 위의 과정을 종합해보면 두 가지로 압축된다.
① 정전협정에 대한 방해를 통해 미국의 “정전협정의 체결”이 무산되는 것
-> 당시 미국은 하루 빨리 정전협정을 맺어 참전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정전협상의 부당함을 내세우며 독자적으로 행동하여
정전협상의 성공적인 체결을 방해할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리하여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 가져 왔던 기존의 상황이
계속해서 지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을 상호방위조약이라는 딜을 제시하면서 회유하여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길 원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모든 것은 주로 이해 관계에 입각한 것이다.
② 단독 북진으로 인해 “한국전쟁의 평화적 종결”이 무산되는 것
-> 이승만은 절대적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원했다.
하지만 미국은 분단된 상태의 한국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통일된 한국을 지지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분단 상태를 지속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원하는 결과이고
동맹국들이나 한국은 통일을 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통일을 하자니 당시 공산주의 세력이던 중국과 소련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공산주의 세력과 부딪힌다면 핵무기의 사용이나
전면전이 불가피할 만큼 파국에 가까운 전쟁
바로 3차 대전이 일어날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평화적인 종결을 원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단독으로 북진을 감행한다면
이는 미국이 원하는 입장에 크게 반하는 것이며
그를 통제하기 위해 상호방위조약이라는 카드를 내민 것이다.
이렇게 팩트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과정을 살펴 보았다.
결국 이승만은 전쟁 이후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 미국을 상대로 외교를 하여 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낸거고
미국은 6.25 남침전쟁의 평화적인 종결을 원해
이승만에게 상호방위조약을 제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외교에는 자국들의 이해 관계가 복잡히 얽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재 문재인 정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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