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김구 선생은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남북협상을 제의했다.
이에 북한은 3월 25일 북조선 인민 민주주의 민족 통일 전선의 명의로 수락을 한다.
이로서 방북의 길이 열렸고 민족 평화통일을 위한 마지막 시도가 이루어졌다라고 대부분 알고있다.
좌파 좀비들과 교과서로 교육받는 애들은 이 행보를 보고 민족통일 지도자로 칭송을 한다.
그래서 실제 남북 연석회의가 어떻게 준비되고 또 김구와 김규식이 참여할때 북한의
치밀한 포섭 공작이 어떻게 시도 되었고 성공했는지 간략하게 이야기 하려고 한다.
우선 남북 연석회의 과정에서 1947년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연석회의 부분을 전개하고자 한다.
김구는 1947년 11월 30일 이승만과의 경교장 회담에서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대해서 지지의사를 분명히 했다.
1947년 12월 2일 김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나고 김구는 암살배후로 지목되게 된다.
위기에 몰리자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승만이 외면함으로서 김구에게 격렬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다.
1947년 12월 22일 단정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후부터 김구와 김규식은 공동노선을 전개한다.
소련 군정장관 스티코프가 1947년 9월에 제안한 내용인 북한의 입장(미소 양군 철군후 선거)을 대변하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시 김구 발언에 대한 각계 반응도 어리둥절 수준이였다.
撤兵(철병)과南北會談說(남북회담설)은 蘇聯主張(소련주장)을代辯(대변)
金九氏民族陣營離脫(김구씨민족진영이탈)?金九氏談話(김구씨담화)에 對(대)한各界反響(각계반향)
동아일보 | 1948.01.30 기사
자 여기서 부터 드디어 남북 연석회의 참여과정까지 북한의 거물 간첩 성시백이 등장을 한다.
우선 성시백은 임시정부에서 항일운동을 했으며 항일운동가들과 인연이 있던 인물로서 공작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임시정부 인사들을 활용했다. 남파 간첩으로서 언론인 국회의원 군인 민족지도자들까지
접촉하여 공작을 벌였는데 대표적으로로 굵직한 국회 프락치 사건도 바로 성시백의 업적이다.
이빨갱이 새끼는 6.25 남침전쟁때 총살당해 뒤짐
김일성은 성시백에게 1947년 11월 남북 연석회의 참여를 위한 김구. 김규식에게
합작 의사를 전달하는 임무를 부여하고 민족지도자들을 포섭할것을 지시한다.
이미 남북연석회의는 소련과 북한의 치밀한 준비작접에 의해서 이루어진것이다.
하여튼 포섭 임무를 맡은 사람들은
김구는 성시백, 김규식은 권태양이 포섭을 한다.
이중 권태양은 성시백의 공작원이였고 성시백은 김구를 어떻게 포섭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1997년 05월26일, 북한 로동신문 특집 보도문에 실린 내용 일부를 발췌한다.
(호칭은 수령님을 --개새끼로 읽을것)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 렬사”
1997년 05월 26일, 북한 로동신문 특집 보도
위대한 수령께서는 성시백 동지의 이러한 투쟁소식을 들으시고, 그를 높이 평가해 주시면서 성동무가 이번에 큰 일을 하였다고, 그는 재간도 있고 무슨 일이든지 결심하면 꼭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라고 거듭 치하해 주시면서 못내 만족해 하시였다. 성시백 동지는 4월 남북련석회의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극단한 반동분자로 있던 김구선생을 돌려 세우는 사업체에도 큰 힘을 넣었다.
중략...
김구선생은 그의 이 말을 듣고 한숨을 푹 내 쉬더니, <자네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하나도 없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이라면 무조건 경원시하며 적으로 규정한 이 김구를 북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반가워할 리야 없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중략....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실례를 인편으로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 드리였다. 그의 보고를 받으신 김일성 수령님께서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할 각계 민주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면서 김구, 김규식에게 보내는 초청장만은 성시백 동지가 직접 전달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 선견지명의 지략에 탄복하면서 성시백 동지는 즉시 김구선생의 서기에게 김일성 장군의 특사가 곧 찾아간다는 것을 알리고 그의 집으로 가게 되였다.
간단한 인사 말이 오고 간 다음 성시백동지는 김구선생에게, <선생님은 전번에 북의 공산주의자들이 과거를 불문에 붙인다는 것을 무엇으로 담보하겠는가고 물으셨지요?>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그리고는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선생님의 애국충정을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고 지나간 일들을 모두 백지화할 것이라고 담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의사를 전달할 뿐입니다>.
중략...
성시백 동지가 일어나서 김구선생에게 엄숙히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우리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백범선생에게 보내시는 남북련석회의 초청장입니다>. 이 순간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김구선생의 얼굴이 감격과 흥분으로 붉어졌다. <김일성 장군님께서 그처럼 믿어 주실줄은 내 미처 몰랐습니다. 장군님께서 불러 주셨으니 기여이 평양으로 가겠습니다. 내 이후로는 다시 일구이언하는 그런 추물이 되지 않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92년 12월 어느 날에 이때 있은 일을 회상하면서 1948년 4월 남북련석회의때 성시백의 활동이 컸다고 하시며,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신 후, <나는 앞으로 회고록을 쓸 때 해방후 남북련석회의 대목에 성시백의 활동내용을 적어 넣으려고 합니다>라고 하셨다.
이하 블라블라
중간요약 - 김일성의 지령을으로 성시백이 김구에 대한 포섭임무를 맡고 김일성 명의로 일체의 신변 안전보장을 약속하여 방북을 성공시킴
여기서 또 교과서가 알려주지 않는 비사가 있는데 김구의 최측근인 엄항섭도 성시백과 끈이 닿았다.
엄항섭은 1948년 2월 10일 김구가 발표한 「3천만 동포에 읍고함」이란 성명서를 작성할 때도 성시백을
두 차례나 만나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전해진다.
" 1948년 남북 협상에 관련된 북한의 대남 정치공작" 양동안
http://www.kanis.or.kr/kboard/file/02-%20%BE%E7%B5%BF%BE%C8.pdf
가운데가 김구 오른쪽이 아들 김신(아주 훌륭하신분)
북한의 공작은 성공했고 김구는 수많은 지지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피하다 싶히 해서 방북을 하게 되었다.
이후 김구는 북한의 대대적인 선전 수단으로 활용이 되고 그는 정치적인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추종세력들은
김구를 떠나 이승만과 함께 했으며 또한 백의사 단체같은 전설적인 백색 테러단체와도 차츰 거리를 두게 된다.
이후 단정건국에 있어서 중국 유어만 공사가 지지해줄것을 설득했으나 김구는 반대를 분명히 했으며
중국(자유중국)공사와의 회담에서 북한 공산주의 세력의 군사력을 목격하고 적화할것이라는 예상을 발언까지 한다..
이후의 행보까지 감안해서 보면 김구는 건국에 비협조 수준을 넘어선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듯 하다.
대표적으로 여순반란 사건 배후로 이범석에게 지목 되기도 했었다. 진실은 북한이 망해봐야 알듯 ~
관련썰 - https://jinanmuzik.tistory.com/652
중국공사와의 회담전문 -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2384&C_CC=AZ
Kim: One of the motives for going to the Leaders Conference was to see the actual things happening in North Korea. Even if the Communists stop expanding the Korean Red Army for three years to come, all the efforts in South Korea will hardly be able to build up an army to the present strength of the red army. The Russians will easily set it on its southward swoop without incurring the blame for the moment a government is set up here, the People's Republic will be proclaimed.
김구: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南進하는 데 써 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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