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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진열장/대한민국

여순반란 사건에서 사라진 이름: 김구와 오동기

by JiNan's 2019.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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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합작에 의해서 일어난 여수·순천 반란사건(여순반란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이하 여순반란 사건) 당시 정부측에 의해서 김구와 남로당이 결탁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김구와 오동기라는 이름이 여순반란 사건에서 사라진다.
현재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만 일어난 폭동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다.

여순반란 썰 : https://jinanmuzik.tistory.com/652

 

여수.순천반란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김구(Feat. 레베데프 비망록)

여수 순천 반란사건은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려고 대기중인 국군 14연대 안에서 남로당 군인들이 군장교들을 죽이며 폭동을 일으켜 여수와 순천에서 빨갱이들에 의한 대단위 민간인 학살까지 벌어진 사건이다. 그런..

jinanmuzik.tistory.com

 

정부가 극우정객이라고 발표한 근거에는 14연대장 오동기가 등장을 한다.
여순반란 사건 전 최능진의 국민 혁명군 사건에 연루되었고 해당조직 군사총책으로
14 연대장 오동기가 체포되었고 수사과정에서 남로당 간부(이재복)들까지 체포되면서
숙군과정에서 박정희까지 털려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이후 박정희는 1963년 대선에서 남로당원 색깔론으로 공격을 당한다.

 

최능진의 국민 혁명군 사건이 조작이다 뭐다해서 지금까지도 말이 많다.
뭐 어차피 최능진 썰이 아니고 오동기에 대한 썰이니 오동기에만 집중을 한다.
오동기는 항일 운동가 출신이였다.

항일시기 우익계였고 김구 추종세력중 한명이며 건군과정에서 군에 투신을 했다.

여순반란 배후로 지목된 김구
이범석은 건국진영에 가담하였고 당시 국방장관겸 국무총리직에 있었다.
이범석은 청산리 전투와 자유시 참변 생존자 였고 김구와 항일 운동을 했다.
그런 이범석이 동료 김구에 대한 극우정객이라는 표현을 하며 공격을 했던 이유에는

우익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북 연석회의 방북(1948년 4월)을 했고

건국진영에서 완전히 이탈한 것이 작용 한것으로 보인다.

김구 방북에 관련된 썰 : https://jinanmuzik.tistory.com/650

 

1948년 김구의 행적을 알아보자...

좌좀이나 선동된 사람들이 김구가 대통령 되었으면 통일 대한민국이 되었을거라는 망상을 하지만 해방후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면 그럴일은 결코 있을수 없었다. 가장 명백한 것이 절대군주 스탈린이 단독정부 수립..

jinanmuzik.tistory.com

뒷줄 안경 좌측 광복군 사령관 지청천 우측 광복군 총 참모장 이범석 

이범석이 공개적으로 김구 배후설을 제기함  
一部陸軍部隊叛亂騷擾(일부육군부대반란소요) 共產系列(공산계열)과 極右分子(극우분자)도 策動(책동)
동아일보 | 1948.10.22

 

제1회 124차 국회본회의에서 국무총리, ‘1948년 4월 이후 국내 소란사건’에 대하여 종합 보고  
1948년 12월 08일  제1회 국회속기록 제124호, 1240~1256쪽 1948년 12월 08일  

 

第남사건
. 경과

 

가. 원인
1. 南勞黨의 세포가 부대 내에 침투한 것
2. 제주도에 출동시 제14연대내 좌익 세포에게 당 지령이 있는 것
3. 지방인 좌익 청년단체 급 학교 내에 좌익 세포망이 군세포망에 速繫된 것
4. 吳東起(오동기)소령 체포로 말미암아 극우극좌의 합작음모가 폭로한 것

소련 군정장관 레베데프 비망록에도 등장하는 오동기
https://ridibooks.com/v2/Detail?id=120034279

▲ 1948년 10월 22일  남한상황 
1. 병사들이 탄 5대의 군함이 봉기자들에게 가세했다.
2. 제 14연대장 오동기가 체포 되었다.
- 어떻게 할것인가 . 가세할 것인가 말 것인가
- 여수 순천 고흥 보성 곡성 순창 하동 광양 구례
- 두 지방도시 광주와 전주에서 전투가 발생했다.
- 조용히 노동당이 참가하기 시작했다.



안두희 재판기록에서도 거론된 오동기
물론 김구는 배후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박을 하면서 개입설 일체를 부정한다.
여기에 완전한 의혹을 씻을수 없는 근거로서 레베데프 비망록에서

오동기에 대한 관련 기록을 찾을수 있어서 의혹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하나더 오동기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바로 안두희 공판기록 기사 였다.

안두희

 

李完用(이완용)과 同一視(동일시) 白凡翁(백범옹) 現政府(현정부)를 罵倒(매도)
동아일보 | 1949.08.06 기사(텍스트)

安斗熙(안두희)가말하는金九翁狙擊經緯(김구옹저격경위) 激論(격론)끝에殺害(살해)를決意(결의)
경향신문 | 1949.08.06 기사(뉴스) 

암살범 안두희 공판에서 자신을 김구에게 소개해준 김학규 장군에 대한 썰을 푼 다음

김구에 대한 썰을 푸는 과정에서 오동기란 이름이 튀어 나온다. 
"항상 국회 소장파의 주장에 공명하였다.

대통령과 정부를 똑바로 불러본일도 없었고

그들이 보내주는 경찰관을 호위가 아니라 나의 감시인이라고 하여

나에게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찾아 오지 말라고 말하였다. 

오동기나 김석황과 내가 만난것을 누가 보았다면 한독당은 크게 코 다쳤을것 아니냐고 말하였다.

그리고 금년 8월 15일 전후에는 무슨 큰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안두희 재판기록상에서도 김구와 오동기와의 접촉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오동기는 재판에서 10년형을 언도받았으나 6.25 남침전쟁 발발로 서울 함락후 인민군에 의해서
석방되었다가 국군이 수복한 이후 다시 자수하였고 이것이 참작이 되어 5년형이 감형되어 출소했다.

오동기는 우익에서 좌익으로 전향 했을수도 
오동기는 출소후 혁신계에서 활동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혁신계는 좌파적 지하활동 조직이니 항일시기의 오동기와는 거리가 상당히 있다.  
6.25 남침전쟁 당시 국군은 학살대상 이였음에도 석방해주었다는 것이 궁금해진다.

 

 

성시백 사건급 남파 간첩 사건에 연루된 오동기
6.25 남침전쟁전 이전에 남파 스파이 성시백이 대활약을 하다 총살당해 죽고
성시백의 계보를 잇는 남파 간첩 박정호가 체포(1957년)되면서

또다시 오동기 이름이 튀어 나온다. 

박정호 얼굴을 볼수 있는 곳 ( 맨 좌측 )
http://db.kdemocracy.or.kr/isad/view/00721776

박정호는 위장귀순 남파 간첩으로서 활동하다 털려서 사형당해 뒤진 빨갱이였다.
북한 내무상 방학세가 박정호에게 내린 남파 지령은 다음과 같다.

1. 서울에 침투하는 즉시 위장자수하여 정당에 침투할것
2. 조봉암과 자유당의 유화청 청현모 진승국을 포섭하여 5.20 민의원으로 당선 시킬것
3. 각종 중요 기밀을 탐지 보고할것

 

間諜朴正鎬(간첩박정호)의罪狀判明(죄상판명)
경향신문 | 1957.11.07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오중환이란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글쎄 그가 바로 오동기였고 그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암약하였던 것이다.
다시한번 여순반란 사건의 추억을 되살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요모 조모
1957.11.16 경향신문 2면 사회 기사(뉴스)
세상이란 좁고도 넓은것 = 박정호 간첩사건의 끔찍한 흉모가 속속 드러나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는데 십사일 박과 같이 기소된 오중환 이란 자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 나는 "여수 . 순천 반란" 사건을 지휘한 유명한 오동기 소령이라는 것
......


1963년 대선에서 언급된 여순반란 사건
이렇게 오동기는 여순반란 사건의 중심인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각인 되었었고
여기에 김구가 배후에 있다라는 의혹까지도 이어져 오다 1963년 박정희 시절에
오동기란 이름이 또 튀어 나온다.

1961년 위대한 5.16 군사혁명후 군정기간을 마치고 1963년 민선 대통령 선거전에 나오면서
박정희 윤보선 구도로서 대선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에 대한 과거사 공격으로서 여순반란 사건을 색깔론으로 팔아먹는데

오동기가 또 거론된다.

당시 자료를 공개한 민정당 임시 대변인은 김영삼 ㅋㅋㅋㅋ

麗順事件(여순사건) 朴正熙(박정희)씨關係資料(관계자료) 民政黨公開(민정당공개)
1963.10.13 동아일보 2면 정치 기사(텍스트)

그러나 결국 색깔론을 딛고 박정희는 호남과 영남에서 승리함으로서 최초 민선정권을 창출하였다.
이후 박정희에 과거 경력에 대한 시비는 없었으며 더이상 여순반란 사건 떡밥은 등장하지 않았고
오동기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갔고 역사에서조차 사라졌다.

팩트가  파편화된 근현대사
현재 여순. 반란 사건에 김구와 오동기의 이름이 완전히 빠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김구 성역화에 가담한 좌우측 모두 더이상 오동기와 김구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있다. 
일종의 양측 모두에게 불편한 역사인셈~ 역사 교과서에서도 여순반란 사건에서도 김구와 오동기는 없다.
그러나 오동기와 김구의 여순반란 사건에 대한 기록은 산발적 이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안두희의 증언에서 김구는 오동기와 접촉이 있었고 여순반란사건 당시 오동기의 체포를 북측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김구는 안두희에게 오동기를 만난것에 대해서 비밀엄수를 해줄것을 요구 했으며 여순반란 사건 시기는
김구와 이승만의 사이는 방북후 완전히 벌어질대로 벌어진 건국 직후였다.

 

또 김구는 4월 방북때 김일성에게 미군정이 탄압할 경우 은신처를 제공해줄수 있는지 물었고

김일성은 긍정적으로 대답을 했다(레베데프 비망록) 오동기는 계속해서 대남 공작 활동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건국사를 보면 여기저기 파편화된 기록들이 너무나 많다.  
제대로 알수 없도록 여기저기 오체분시 해놓은것 같은 느낌이다.

여러 이유로 특정 인물을 비하 또는 미화하기 위해서

가리고 색칠하고 왜곡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는 사실만을 바란다.

그것이 누가됐던 어떤 의미가 부여되던 오로지 진실 그것만을 원한다.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지 비판과 찬양으로 끝나면 역사는 반복된다.

 

 

 

 

출처: 여순반란 사건에서 사라진 이름들 김구. 오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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