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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원인: 청의 경제적 재앙.

by JiNan's 2019.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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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는 광해군이 중립 외교 정책으로 전쟁을 피하고
인조의 친명 배금 정책이 전쟁을 유발했다는 통념을 믿는다.

그러나 광해군이나 인조나 '대명(大明) 사대주의'는 기본 옵션이고
'현상 유지'에 가까운 외교 정책을 취했다.

두 군주 모두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사실 광해는 인조보다 더 강도 높게 후금을 비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번 글의 주제는 병자호란의 원인을
조선의 외교 정책이 아닌
당시 전 지구적으로 불어닥친 소빙하기와
그로 인한 청의 경제적 재앙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는 병자호란의 원인을 설명할 때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사실 청에게 있어서 조선 출병은 자국의 모든 역량을 건 일대 전쟁이었고
병자호란 때문에 청은 기사회생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중 매체에 나와서 역사를 강의한다는 유명 인사들은
대중들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역사 왜곡을 해왔다.

또한 오늘날 독해력과 문해력이 떨어지고 자료 수집력도 없는 대중들은
자료를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도 없이, 유명 인사들이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

헬조선에서는 선동 당하는게 일상적이니 뭐 이해할 만 하다.
각설하고 시작하겠다.

17세기의 위기(The Crisis of the Seventeenth Century)
소빙하기(Little Ice Age)의 대두와 절정

아이러니하게도 17세기 동아시아 명청 교체기에서
소빙하기에 주목한 곳은 영미 역사학계였다.

윌리엄 애트웰(William S. Atwell)은 소빙하기가 명청 교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로버트 마르크스(Robert B. Marks)는 소빙기 기후 변동이 중국 환경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석한다.

지난 600년 동안 하계 한랭화 발생 표1

17세기 전반 급격한 확장을 꾀하고 있던 만주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사실 청 태조 누르하치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 장수 이성량이 자금 지원을 해주면서
무순 · 청하 · 관전 · 애양의 4개 관을 이용한 교역을 허용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명과의 인삼 무역은
누르하치의 큰 경제적 수입원2이 되었다.

 


1. K.R. Briffa et al., lbid(1998), p450 

2. 청나라 태조무황제실록 1605년 기사 中: 대명국에 인삼을 팔아 평소의 배에 달하는 가격을 얻다​.

명나라 요동의 제왕, 이성량(이여송의 아버지)

그러나 누르하치가 '7대 원한'을 내걸며 대명 전쟁을 선포하자
명나라는 누르하치에게 '교역 중지'를 선언하며 교역을 모조리 끊어버렸다.

이로부터 만주의 인삼은 팔 수 있는 곳이 없어 창고에서 썩어나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누르하치가 생각한 발상은 농업 경제 유치였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요동의 주요 성곽을 공격하여 빼앗았지만
영토 확장과 통치 개념이 없었고 세금을 걷는다는 개념도 없었다.

전형적인 유목민식3 약탈 경제를 일삼아 포로는 허투알라 성4으로 끌고 왔고
이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해서 경제적 자립을 추진5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누르하치대에 중앙 집권 국가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고
누르하치에겐 명을 정복하겠다는 야심도 없었다.
누르하치 역시 명이 대국임을 인지하고 있었고
좀 높게 쳐봤자 요동에서 자립적인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꿈에 그쳤을 뿐이다.

 


3. 여진족은 순수한 유목 민족은 아니고 농경과 수렵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민족이다.
4. 초기 누르하치의 본거지
5. 청나라 태조무황제실록 1607년 기사 中: 약탈한 포로를 건주위 성안으로 옮겨놓다
조선왕조실록 1607년 10월 27일 기사 中
조선왕조실록 1607년 12월 28일 기사 中
조선왕조실록 1609년 4월 21일 기사 中
조선왕조실록 1609년 12월 19일 기사 中

명의 교역 중지 선언은 만주에게 큰 타격이었다.
즉각 만주는 경제적 문제에 직면했다.
그리고 당시 소빙하기로 인해 1627년에는 대규모 기근6이 발생했다.

 


6. 청나라 실록 태종(太宗) 1627년 6월 23일 기사 中: 이때 나라에 대기(크게 굶주림)하였고 (중략)

홍타이지는 나라 곳곳에 명령을 내려
8기의 수장들에게 자신의 영토를 모두 조사하여
밭 경지 면적과 식량의 유무를 조사하라 명했고
식량이 없는 사람들을 구제하며 농사를 짓지 않는 원인을 파악하라 명한다.

게다가 흉년에 따른 심각한 기근으로 곡물 및 가축 가격이 폭등하였고
도적이 전국 각지에서 출몰하였다.
심지어 인육을 먹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7

 

 

7. 만주어 만문노당 1627년 6월 23일 기사 中

1627년 만주에서 거래된 재화의 은 값8

이미 누르하치 때부터 시작된 사회 경제적 문제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1621년 이후로 한인과 만주인의 대립이 극심해지고 있었고
식량 공급에 위협을 느낀 한인들의 폭동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1623, 1625년의 한인의 반란은 만주 사회를 거의 붕괴 직전까지 내몰고 있었고
1627년에 이르면 만주는 그야말로 경제적 재앙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1623년에 비해 1627년에는 곡물값도 무려 8배가 증가하고
모든 재화에 있어서 급격한 인플레이션(Inflation)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8. 청나라 실록 태종(太宗) 1627년 기사 中: 재화의 물가가 급격히 뛰어 사회적 불안이 대두되다.

만주의 땅도 농업에 적절한 땅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만주에게 농업 기술이 부족했다.
한인과 조선인을 확보해서 농업 경제를 유치하고자 했지만
곳곳에서 민심 이반과 함께 폭동이 발생했고
요양과 심양 지역의 농업 경제 유치도 실패했다.


9. http://passel.unl.edu/pages/informationmodule.php?idinformationmodule=1130447033&topicorder=7&maxto=12&minto=1
토지 품질(Land Quality)에 대해 평가한 지도.

10. Global Temperature Trends From 2500 B.C. To 2040 A.D.

 


인구가 100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만주는 인적 · 물적 자원이 부족해졌고
무엇보다 사회 경제를 유지할 생필품의 문제는 심각했다.

그런 과정에서 명나라는 점차 군사적으로도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1625년부터 명나라 장수 웅정필의 반격이 시작됐고
1626년에는 누르하치가 이끈 6만의 만주 군사가 영원성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명나라는 영원성 전투에서의 승세를 바탕으로 금주 일대까지 전진했고
만주의 패배에 고무된 몽골의 할하부 또한 명과의 동맹을 확대,
만주 방면을 위협하면서 만주에게 불리한 상황이 조성11되고 있었다.

심지어 명나라는 삼차하(三叉河) 부근까지 전진하여
금주(錦州), 중좌(中佐), 대릉(大陵)의 3성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의 정예 팔기 3만 명이 전사하는 큰 군사적 손실12있었다.

 


11. 노영구, 『인조 초~병자호란 시기 조선의 전술 전개』 (한국사학보 41, 2010).
12. 청나라 실록 태종(太宗): 삼차하 부근에서 아군이 대패하다

만주의 경제적 위기 돌파 1번째: 조선 출병, 정묘호란(1627)

1626년에 명나라에 대패하여 삼차하 이동까지 후퇴한 만주는
심각한 경제적 재앙에 직면하고 있었다.

당시 8기의 병사가 굶어 죽는다는 보고가 속출했고
계속되는 내부 한인의 폭동과 약탈로 생필품이 부족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는 첫번째 대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조선 출병을 선언했다.
만주는 조선에서 충분한 생필품을 획득하여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주는 조선과의 무역을 관철13 14시켰다.
(엥? 친명 배금 정책 인조 정권이 오랑캐와 교역했다고? 그거 실화냐...)


13. 조선왕조실록 1627년(인조 5) 11월 2일
청과의 무역 등을 논하다
14. 조선왕조실록 1627년(인조 5) 12월 22일
청에 사신을 보내 개시하는 문제와 포로 쇄환을 두고 교섭하다.

심지어 만주는 조선과의 변경 지대에 개설한 무역장 설치에도 인삼 등 재고가 남아돌자
회령에서도 개시 무역을 할 것을 조선에 요구15하기도 했다.
그만큼 만주의 사정은 열악한 상황이었다.

 


15. 조선왕조실록 1628년(인조 6) 2월 22일
청이 회령에서도 개시할 것을 요구하자 대책을 논의하다.

그리고 영원성 전투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홍타이지는 다음과 같이 명나라에게 요구했다.

1627년 즉위한 홍타이지는 명나라 장수 원숭환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막대한 예물을 요구했는데
처음의 요구는 금 10만 량, 은 100만 량, 비단 100만 필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요구가 터무니 없는 것을 알자,
다시 금 1만 량, 은 10만 량, 비단 10만 필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귀국(명나라)이 (예물을 보내기에)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면
처음 화의를 맺는 예로서 예물 액수의 반을 덜어도 됩니다."16


16. 太宗文皇帝實錄 권2: 대명국에 다시 사신을 보내 예물을 줄여 보낼 것을 요구하다.

심지어는 명나라 황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요동 국가로서 명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움직임도 나타냈다.

"우리는 뜻을 헤아려 하늘보다 대명의 황제를 한 글자 내리고
대명(大明)보다 우리를 한 글자 내리고
우리보다 대명의 관리들을 한 글자 내려서 썼습니다."

그러나 명은 타협의 여지가 없었고
1635년과 1637년에 또 다시 식량 위기가 닥쳤다.

홍타이지는 1636년 1월 30일 이전에 몽고 병력이 청나라로 오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철저히 '자국의 식량 사정 때문에' 외번 몽고를 못 오게 한 것을 비밀로 하였다.17
또한 이 시기 인조의 화친 친서가 왔으나 홍타이지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당장 경제적 문제 때문에 화친이고 뭐고 가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18


17. 만주어 만문노당 1636년 10월 16일 기사 中: 외번 몽고가 만주로 오는 것을 금지시키다
18. 만주어 만문노당 1636년 10월 27일 기사 中: 조선국 사신이 보낸 화친 조서를 보지 않고 폐기시키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 피터 퍼듀(청나라사 연구 권위자)

미국 역사학자 피터 퍼듀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 그러나 1627년 만주 국가는 '경제적 재앙'의 문턱에 있었다.
1635년과 1637년에 또 다시 식량 위기가 닥쳤다.
조선은 다시 한번 매력적인 목표가 되었다."19

이미 만주는 자신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조선을 침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20 21

 


19. 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ural Eurasia) p164~166
20. 청(淸)과의 외교 실상과 병자호란 - 오수창 / 오항녕 교수
21. 김한규 한중 관계사 2권, p719~720

곧 만주 사회 곳곳에서 전쟁 준비가 한창이었다.
흔히 병자호란 때 청군 규모를 10만~12만 8천여 명으로 추측22하고 있으나
여러 연구 자료와 만주어 사료를 검토한 객관적 자료를 따지면 5만여 명 정도로 추정23하고 있다.

 


22. 삼전도비(10만 명), 조선왕조실록의 과장된 규모(15~30만 명)
23. 구범진, 이재경 논문 中: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구성과 규모

 

 

그러나 당시 만주어 자료와 만주의 형편을 고려했을 때
요즘은 학계에서도 병자호란 때 청군의 규모를 5~6만 명 수준으로 추정하고 있다.

24. 만문노당 청태종 실록

한편 조선 원정에서 편성된 군수 물자는 다음과 같다.

조선 선봉군 만주 8기와 몽고 8기는 총 21,580명의 병력이 모였는데
1636년 11월 29일에 심양성 밖에 집결했을 때 휴대 군량은 15일치가 고작이었다.

11월 30일에 심양성 밖에 집결한 외번 몽고족 12,000여 명의
총 휴대 군량은 20일치가 고작이었다.25 26 27

군수 물자가 턱없이 모잘랐고 군량도 턱없이 모잘랐다.
만주는 속전속결을 원했고 부족한 군량은 조선 현지에서 조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완전히 도박이었다.


25. 만문노당 청실록 번역
26. 太宗文皇帝實錄: 만주와 몽고병을 심양에 집결케 하다
27. 조선왕조실록 1636년 12월 27일 기사 中

만주가 이렇게 겉으로 위풍당당한 면모와는 다르게
내부적으로 이미 재앙의 문턱과 '망국의 조짐'까지 보였음에도
정보가 부족한 조선과 명이 알 턱이 없었다.

만주가 조선에 출병했을 때 이미 만주를 방위하고 있었던 팔기는 고작 2만 명이었고
명나라 총병 조대수는 만주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대수가 6~7만의 철기병을 이끌고 만주로 진군하고자 했으나
여러 장수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그냥 산해관으로 돌아왔다.28 29

조선과 명나라는 일이 이렇게 풀리지가 않았던 것이다.
명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내부 다툼으로 알력이 많았다.


28. 조경일록 1637년 윤4월 18일 기사 中
29. 명사(明史): 조 총병이 관외의 철기 6, 7만 명을 거느리고 삼차하를 건너갔다가
오랑캐의 군사들이 보이지 않자 퇴각하다

병자호란과 조선의 항전: 조선의 커다란 악재

만주는 서북방 요새의 조선군을 본 채도 하지 않고 곧바로 서울로 내려왔다.
오히려 조선군이 후방에서, 남하하는 만주군을 추격하는 이상한 형국이 된 것이다.

게다가 국왕 인조는 재빨리 강화도나 삼남 지방으로 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고립된 형국이 되었다.
일은 여기서부터 풀리지 않았다.
선조처럼 도망이라도 잘 가서 지구전을 폈으면 충분히 유리한 싸움이었다.

실제로 남한산성은 잘 버티고 있었다.

지방 근왕군의 패전(쌍령 전투)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전라도 근왕군(광교산 전투)과 평안도 근왕군(김화 전투)은 승리했다.

게다가 남한산성에 주둔한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은 '중앙 경군(京軍)'이었다.
당연히 전투력 자체도 청군 버금가게 뛰어났고 실제로 잘 버티고 있었다.

아예 인조가 북을 치며 전투를 독려하자
조선 어영군(중앙군) 수백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백병전을 전개해
청군 300여 명을 도륙하고 승리하기도 했다(조선군 80명 전사).30

 

 

30. 승정원일기: 아군(조선군)이 연주봉 3개 고지를 점거하다

실제로 남한산성에 주둔한 조선 중앙군의 전투력은 매우 뛰어났고
청군이 1만 명 규모로 산성 주변을 압박하며 공세를 몇 차례 퍼부었음에도
조선군은 행주 산성에 보여준 화력전으로 대규모 화력으로 청군을 저지했다.

당시 남한산성에 보유한 조선군의 화약 규모는 어떠했는가?

31. 이서의 남한지: 아군(조선군)의 산성 내부 비축 무기

인조는 나름 전쟁에 대비한다고 남한산성에 충분한 무기를 비축하고 있었다.
산성 내부에 비축한 탄환만 170만 발이 넘었고
청군이 산성을 오르면 비격진천뢰를 던져 폭사시켰고
총통을 쏘아 청군의 공격을 잘 저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청군이 홍이포를 쏘아 성벽을 무너뜨리면
당시 조선군은 흙으로 성벽을 메꾸면서(당시 겨울이라 바로 얼었음) 방위력을 보강했고
아예 조선군이 청군의 홍이포 진지를 저격해 청군 장수와 청군을 폭사시키기도 했다.32


32. 승정원일기: 아군(조선군)이 오랑캐 진영을 폭사시키다(청군 장수 3명 사살)

그러나 조선은 더 큰 문제에 직면했으니.

산성의 군량은 고작 2만여 석도 되지 않았고
전쟁 이전에 한 관리의 삽질로 남한 산성의 군량을 빼돌리기까지 했다.

게다가 강화도 함락으로 인조가 패닉에 빠졌고
함경도 정예병 2만 명을 이끈 도원수 김자점은 후방에서 청군을 급습할 생각도 없이
진영만 꾸리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결국 군량이 떨어진 조선 정부는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고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 항복하였다.

청나라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는데
청나라 침공군 5~6만여 명 중에서
청나라측이 밝히기를
갑병(甲兵) 7,000여 명과 장교 300명이 조선 원정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손실률 16.7%).33
그리고 추가적인 부상자는 수만 인(人)에 달했다고 밝혔다.34


33. 조선왕조실록 1637년(인조 15) 7월 4일
사은사에게 청의 실정과 삼학사 등의 일을 묻고 술 마신 일을 문책하다
34. 청태종문황제실록: 조선 원정 때 죽은 장사들을 위로하다

중국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으로 망했다.
당시 17세기 소빙기로 중국 대륙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고
중앙 정부의 삽질과 내부 농민의 체제 이반 등 선대 황제부터 이어졌던 폐단이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최후의 순간에도 청나라는 '자신의 힘'으로 산해관을 뚫지 못했다.
5만의 명나라군은 최후까지 만리장성을 내주지 않았고
오삼계가 스스로 열어 주어 마침내 청나라는 중원에 입관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출처: [역사 / 사진 스압] 병자호란의 원인: 청의 경제적 재앙(청은 멸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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