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 진열장/여러정보들 집합소

고려시대의 노비는 어땠을까?

by JiNan's 2019. 6. 19.
반응형

고려인은 노비를 반역과 범죄에 대한 처벌로 생겨난 국가노예로 이를 상당히 불온시했다.

안 좋게 봤다는 것인데, 조선도 노비는 안 좋게 봤었다.

그럼 고려와 조선은 무슨 차이점이 있을까?

차이점은 바로 고려는 노비들을 국가가 철저히 관리한 반면,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의 노비들은 양반가 밑에서 좆뺑이치는 반면 고려는 대부분의 노비를 국가가 소유했다.

그런 이유에서 고려왕조는 노비 수를 줄이기 위해

양인과 노비의 결혼을 강하게 억제했었다.

노비가 양인 여자와 결혼한 경우 노비의 주인이 시켰으면 주인을 장(杖) 100대에 처했으며,

양녀의 부모는 1년의 유배형에 처했다.

또 일반 사가의 노비라 해도

왕실이 그 사용을 허락해 지급한 종자(從者)와 같은 존재로 간주했다.

그로 인해 고려왕조는 국인들이 함부로 노비를 매매하는 것을 금했으며,

이를 범한 자를 귀향형(歸鄕刑)에 처했다고 한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이 법은 고려 말기까지 유효했으며

1308년 충선왕은 민간이 함부로 매매하거나 남에게 기증한 노비를 모두 조사해

왕실의 소유로 돌렸다.

공노비로 확실히 하겠다는 거지.

이 같은 역사적 토대에 구애돼 노비법의 강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노비는 끝내 주인의 완전한 사재(私財)가 아니었다.

그 점에서 후대 조선의 노비와 크게 달랐다. 

포 100∼120필의 노비 가격은 하루 임금이 1필이므로 100∼120일의 노동가치에 해당했다.

노비가 열심히 일하면 수년 안에 몸값의 원리(元利)를 상환할 수 있는 낮은 수준이었다.

고려왕조는 채무에 몰린 사람이 자녀를 노비로 파는 행위를 승인하지 않았다.

채무와 그에 따른 인질은 3∼6년의 기한부 빚으로 취급됐고,

이에 주인과 노비의 관계에 관한 한,

고려의 노비는 해방의 가능성을 전제한 기한부 채무노예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고려의 노비에게서 조선 시대처럼 그의 사회적 죽음을 나타내는 상징을 찾기는 힘들다.

그들의 사회적 인격은 살아있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고려 노비의 존재 양태는

그들이 원래 형벌에 기원을 둔 국가노예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다시 말해 그들은 정치적 이유로 노비가 됐으며,

정치적 상황이 변하면 얼마든지 해방될 수 있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반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공노비는 줄어들고

사노비는 엄청나게 확대됐으며

인신구속의 개념이 명확해지고 위 글과 같이 수탈의 개념이 강해졌다.

 

 

 

 

출처: 고려시대의 노비는 어땠을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