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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진열장/여러정보들 집합소

명나라 만력제의 어메이징한 조선 지원.

by JiNan's 2019.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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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여러 곳에서 올라온 풍부한 육즙의 고기와 해산물.
그리고 천하에서 가장 고운 여인들이 펼치는 화려한 춤시위.

산해진미와 아리따운 여인들은
같은 사내인 황제와 신하들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오늘만은 먹고, 마시고, 노는 날이다.

그러나 이 연회는 황제와 신하가 30년 만에 벌인 오랜만의 연회였다.
황제는 30년 동안 파업한답시고 아침 조회에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황제를 30년 만에 본 신하들의 감회는 어떠했을까?
분명 즐거운 연회였지만, 연회장의 공기는 탐탁치 않았다.

갑자기 황제께서 술잔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신하들 역시 눈치채고 술잔을 들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만력제가 좌우의 신하들을 보며 말하기를,

"선대 황상의 은덕과 충성스러운 인재를 만나
이 시대가 평안해지고 태평해졌도다.
변방은 안정되었고 오곡은 풍성해지고
백성이 태평하도다!"

신하들이 일제히 답하기를,
"황상 폐하의 홍복이십니다, 폐하의 홍복이십니다."

만력제가 기꺼워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답하기를,

"짐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이룬 공업이겠느냐?
짐이 오늘 그대들을 30년 만에 보니 너무 즐겁소.
내 오늘 술잔을 들어도 좋은가!"

신하들이 일제히 답하기를,

 

"천하의 모든 산물이 폐하의 은덕이 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하물며 이 술 한잔 이겠습니까?
변방이 안정되고 사해에 폐하의 은덕이 미쳤으니
그 공업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드셔야 합니다!"

그러나 만력제는 술잔을 들이키지 않고 의도적으로 땅바닥에 부어버렸다.
연회가 시작한 이후부터 불길한 공기는 눈치챘지만
신하들은 바로 술잔을 내리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만력제가 소리치기를,
"짐이 오늘 이 술을 마실 수가 없다.
변방에 우환이 근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왜노가 준동하여 충성스러운 우리의 우방 조선이 전대미문의 환난에 처해 있다.
우방을 보살피는 짐이 어찌 한가로이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황제의 이 한마디로 연회장에 있던 여인들은 모두 빠져나갔다.
신하들은 모두 탁상에서 일어나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다음말을 기다렸다.

"짐이 오늘 연회에 앞서 선대 폐하의 사당에 가서 약속했노라.
조선을 구하고 조선과 환난을 같이 해
전에 없는 영광스러운 새 시대를 만들겠노라고!"

이때 조지고(조애경)라는 신하가 황제의 분위기를 깨며 나왔다.


"폐하... 구석진 외국 조선에... 대명(大明)의 용사들이 죽어나갈 수 없습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만력제는 술잔을 집어 던지고 얼굴에 웃음기를 띠면서 분노한 듯이 말했다.

"너는 짐이 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느냐!
네 머리는 철추의 화강석 같은 머리로구나!

우방이 위태로운데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있겠느냐?"

조지고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터뜨리며 사죄하였다.
예부우시랑 유도명은 오바하며 자신의 녹봉을 왜적 평정에 쓰겠다고 말했다.

곧 병부(국방부)의 장관과 삼군(三軍)의 장수들이 일제히 황제 앞으로 튀어나왔다.

"저희들이 어진 폐하를 만나 다시 볼 수 없는 새 시대를 만났으니
반드시 폐하의 은덕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만력제가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각자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왜적을 평정할 계획을 글로 써서 바쳐라.
짐은 여러 의견의 장점을 모아서, 여러 경들과 함께
'운주유악지중, 결승어천리지외(運籌帷幄之中, 決勝於千里之外)'(1) 하겠노라!"(2) (3) 

(1). 장막 안에서 전략을 세워 천리 밖에서 승리를 한다.
(2). 明史(명사), 이호백(李浩白)의 항왜 원조 1592
(3). 중국 사극 '사마의: 미완의 책사'에서 조조의 죽음은 만력제의 연회 모티프에서 따온 듯 싶다.


곧 중국 대륙은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다.
요동과 천하의 병마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강남의 곡식이 육로와 해로를 통해 운반되기 시작했다.

만력제는 군대 출병에 앞서,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

참장 곽몽징이 만력제가 하사한 은 2만 냥을 가지고 왔다.
만력제는 자신의 나랏일에는 내탕금을 풀지 않았지만
선조에게 대뜸 은 2만 냥을 주며 조선의 군자금에 보태라고 하였다.(4)

(4). 조선왕조실록 1592년(선조 25) 6월 24일 황제가 하사한 은 2만 냥이 도착하다.

임진년에는 명군의 군량을 조선이 부담해줬으나
임진년 이후 1593년부터는 조선의 사정이 악화되어 명이 대부분 부담해준다.

한편 조선의 도로 사정은 너무나도 열악하였는데
만력제가 하북에서 쌀 13만 석을 징발해 조선에 보급해줬는데
조선의 도로 사정이 열악해서 운반하기가 힘들었고
현지에서 군량 수송 부대가 먹어치우는 형편이었다.(5)

5. 明史(명사): 하북의 양곡 13만 석을 징발해 조선의 변경으로 수송하다

군량이 부족한 명나라군은 곳곳에서 약탈짓을 벌이기도 했었다.
뭐 그것과는 별개로 만력제의 무한한 군량 지원은 계속됐다.

1593년에는 산동(山東)의 군량 10만 석을 징발해서 해로로 통해 조선에 보내주었고(6)
1593년 11월까지 요동에서 추가로 군량 14만 석, 산동에서 12만 석이 조선에 보내졌다.(7)

6. 조선왕조실록 1593년(선조 26) 4월 1일 황제가 산동의 군량 10만 석을 배로 운송하여 군량을 보충하게 하다.
7. 조선왕조실록 1593년(선조 26) 8월 19일 비변사가 중국에서 가져 온 군량을 운반할 대책을 아뢰다.

조선은 식량 사정이 악화될 때마다 중국에 사신을 파견해서
군량을 달라고 독촉하기도 했다.(9)

거의 이 정도면 뭐 명나라가 쌀셔틀인거 같은데
조선도 살짝 눈치채긴 했나보다.(10)

8. 웹툰: 호랭총각
9. 조선왕조실록 1593년(선조 26) 8월 28일 장삼외의 충고에 따라 경략에게 군량을 청하는 자문을 보내기로 하다.
10. 조선왕조실록 1594년(선조 27) 1월 9일 청량사 허욱이 곡식을 보내달라는 내용의 자문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나다.

"왜적이 남쪽 변방에 둔치고 있어서 우리 농사도 못 지어용...
황제 폐하아앙 제발 쌀좀 ㅋㅋ"(11)

"장비(선조)야! 내가 유비이고 같은 의형제인데 군량을 못줄거 같노 ㅋㅋ"(12) 

이젠 쌀이 부족할 때마다 황제한테 도움 청하는 것은
조선의 관행이 되어버릴 정도로 군량을 달라고 징징거린다.

11. 조선왕조실록 1598년(선조 31) 4월 1일 왜적이 남쪽 변방에 있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중국에서 쌀을 보내 구제하다
12. 일설에는 만력제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만력제 본인은 유비이고 선조는 관우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만력제가 조선을 도와줬다고 한다.

한편 당시 조선의 재정 상태는 어떠했을까?

조선은 1592년 개전 중에 파악한 장부상 병력이 17만 명(13)이었는데
이후에는 재정 문제로 3만 명 규모까지 감축해버린다.
거의 후반부에는 명나라가 도맡아서 전선을 책임질 정도로.

 

어느 정도였냐면 1593년 비변사 기록에 수도 한양 내의 비축 물자가
쌀과 콩을 합쳐 3만 석이 안된다는 보고가 올라올 정도였다.(14)

13. 조선왕조실록 1593년(선조 26) 1월 11일 각도에 있는 병마의 숫자: 172,400명
14. 조선왕조실록 1593년(선조 26) 11월 16일 비변사가 식량 부족에 대한 계획을 세울 것을 아뢰다.

전쟁 직전 조선의 쌀 생산량은 14만 석이 채 안됐고(중앙 정부의 수입)
콩과 조는 23~24만 석 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열악한 재정 상태에서 1593년과 1594년에 유례가 없는 대기근이 터졌다(계갑 대기근).

가뜩이나 중앙 정부의 수입은 군사비와 관리의 녹봉 등으로 지출하기도 부족한데
계갑 대기근으로 인해 남쪽 변경의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아사하거나 굶어 죽었다.

심지어 이순신의 수군도 해전에서 전사한 숫자보다 역병이나 굶어 죽은 아사자가 더 많았다.(15)
인육을 먹는다는 보고(16)까지 올라와 선조는 선전관을 파견해 인육을 사고 파는 자들을 참수하기도 했다.

구분 전염병(명) 사망자(명) 합계(명)
전라좌도 1,373 606 1,979
전라우도 1,878 603 2,481
경상우도 222 344 566
충청도 286 351 637
합계 3,759 1,904 5,663

<조선 수군의 전염병 피해 현황, 1594년 4월>

15. 이순신, 『임진장초』, 만력 22년(1594년) 4월 20일 계본
16. 조선왕조실록 1594년(선조 27) 3월 20일 중국에서 식량과 군병을 지원받는 문제, 

흉년으로 백성이 식인하는 문제 등을 대신 등과 의논하다.

기근과 역병으로 조선 백성은 물론이고 조선 수군도 아사자가 속출했다.
가뜩이나 굶주려서 면역력이 약화됐는데 역병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의 보고에 의하면 조선 수군의 40%가 굶주리거나 역병으로 전투를 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1595년까지 수군 병력 수는 21,500명에서 4,109명까지 가용 인력이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당시 기근과, 후퇴한 왜적이 남쪽 변경에 주둔하자
당연히 곡창 지대인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농사짓기도 힘들었다.

이 소식은 조선 조정에 의해 명나라에 전해졌다.

황제는 100만 석(17) (18) (19)의 지원을 고려했다.

17. 약 9만 톤, 90,000,000kg, 오늘날 쌀 20kg 450만 포대
18. 명사(明史): 기근으로 허덕이는 조선에 100만 석의 쌀을 구휼하다
19. 조경남의 『난중잡록』

한편 만력제는 명나라 군인들에게 은을 주면서 조선에서 쌀을 사먹으라고 했는데
당시 조선은 은 유통 경제가 발달하지 않아 거래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만력제는 조선으로 하여금 '은 무역'에 대한 개념을 어느 정도 심어주었고
조선은 함경도 단천이나 은 광산에서 은을 캐서 이 무역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조선은 전쟁 과정 중에서 93만 7천 냥의 은을 활용했는데
대부분은 명나라가 지원한 군사 자금(20)이었다.

20.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기근과 국제적 곡물 유통, 김문기

당시 명나라는 조선 원조를 위해
절(浙)ㆍ섬(陝)ㆍ호(湖)ㆍ천(川)ㆍ귀(貴)ㆍ운(雲)ㆍ면(緬) 천하 각지의 남북 군대
총 22만 1천 5백여 인을 징발했고
원정 과정 중에서 2천 만냥의 은을 소비했다.

이중 식량으로 소비된 은이 583만 2천여 냥이었고
약 90만 냥은 조선에 지원해준 양이었다.

또 조선에서 쌀과 콩을 교역한 은이 은 3백만 냥이었다.(21) 

21. 재조번방지, 명나라 병부상서(국방부 장관) 형개의 상소 中

명나라 아프다 건들지마라...

나중에 심하 전투에서는 명나라 요청으로 광해가 파병에 응했다가
9천여 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데
이 소식을 접한 만력제는 은 2만 냥을 전사자 유족들 위로하라고 보내줬다.
물론 궁궐병 정신병자 광해는 자기 뒷주머니로 쏙...

만력제

 

나중에 인조 때 명나라 멸망에 대해 인조와 서인 세력들이 토론(22)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서인 세력들이 하는 말이 또 재밌다.

22. 승정원일기

인조가 말하기를,

 

"300년 동안 이어온 대명(大明)이 왜 하루아침에 망했는가?"

"천조(명나라)의 황제들이 임금답지 못하여 환관들이 정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종(만력제) 같은 경우에는 외국에 관심을 많이 가진 나머지
자국을 멸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중략)"

 

 

 

출처: [역사 / 사진 스압] 명나라 탈짱깨 만력제의 어메이징한 조선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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