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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진열장/Fact 모음

1975년 아르헨티나 Rodrigazo에 대해서...

by JiNan's 2018.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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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75년, 아르헨티나.

거대한 지옥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지옥의 문, 로드리가소(Rodrigazo)라 불리우는 헬게이트에 대해서 알아보자



1. 망국병: 페론의 그림자

당시의 대통령은 여성 대통령 이사벨 페론이었다.

페론이라는 성이 귀에 익지?

그렇다. 이사벨은 포퓰리즘의 원조로 불리우는 후안 페론의 세번째 부인이다. (두번째 부인이 '에비타'로 알려진 에바 페론)



아르헨티나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이사벨은 

당시 여기저기 떠돌며 공연을 하던 댄서였다. 

나이로는 후안보다 무려 35세나 어렸다.

이사벨은 1931년생이었으니 후안을 만날 당시에는 겨우 29세였다.

후안 페론은 에비타를 앞세웠던 포퓰리즘 통치 도중 1955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쫓겨난 후였고 

1960년 이사벨을 만날 당시에는 파나마에서 부활을 다짐하던 망명객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재산을 해외에 빼돌렸던 후안은 노조와 결탁했고 정계에 복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후안은 젊고 아름다운 이사벨에게 빠져들었고 청혼까지 한다.

능구렁이 같은 정치인 후안에게는 젊은 여성에 대한 욕구 이외에 또 하나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후안은 대통령 시절 젊은 백인여성 에비타를 내세움으로서 

얼마나 아르헨티나 개돼지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정치에 젊은 여성을 내세우는 감성팔이가 필요함을 잘 알고 있던 후안은 

에비타의 후임자가 필요했다.

이사벨은 에비타와 외모과 비슷했고 

또 아르헨티나 민중이 가진 백인 여성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금발, 파란눈 등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후안과 결혼한 이사벨은 그때부터 (이미 건강이 나쁘던) 

후안의 측근으로 활발한 대외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안의 지지자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사벨은 정치나 경제에 대한 안목은 없었으나 

누가 남편의 아군이고 적군인지 구분하는 후각만큼은 뛰어났다.


이미 틀딱이 된 후안 페론과 댄서 출신의 영부인 겸 부통령 이사벨 페론



이사벨은 1964년 아르헨티나를 방문하던 중에 

호세 로페스 레가(Jose Lopez Rega)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레가는 아르헨티나의 라스푸틴이라 불릴 정도로 수수께끼에 싸인 인물이다.

그는 겉으로는 성실한 경찰관이었으나 실제 정체는 '용한 점쟁이'였다.

이사벨은 레가의 신통력에 끌렸었고 레가가 하는 말이면 뭐든지 듣게 된다. 



후안 페론은 자신을 몰아낸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이면 누구든 끌어들였다.

후안 페론은 좌파나 우파가 아닌 철저하게 자기 권력만을 챙기던 포퓰리스트였다.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도 페론에게 붙었고,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반공주의자들도 페론에게 붙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페로니스타(페론 지지자들) 내부에서 좌익과 우익의 권력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레가는 냉혹한 반공주의자였고 

그는 이사벨의 신임을 얻어 서서히 공산주의 파벌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후안 페론에게 매우 유리한 결정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자본가들은 페론 지지로 돌아섰고 CIA도 페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자연히 페로니스타 반공주의 세력의 간판과도 같던 이사벨의 지위 또한 올라갔다.

이 모든 게 레가의 조언 덕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사벨은 더더욱 레가를 신임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페로니스타 진영에서 밀려난 공산주의자들은 

게릴라를 조직하여 아르헨티나에서 무장투쟁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후안 페론은 1973년 기어이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권력을 다시 잡는다. 

전국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던 이사벨은 늙은 남편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했고 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1895년생인 후안의 건강은 몹시 나빴고 

그는 대통령으로서 업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영부인 겸 부통령인 이사벨이 대통령 대행으로서 활동하는 일이 늘어났다.

결국 1974년, 후안 페론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겨우 40대 초반의 이사벨 페론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이사벨은 경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호세 로페스 레가조차도 경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다만 이사벨은 남편이 어떻게 권력을 지켰는지, 

누구를 어떻게 매수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을 지지하던 페로니스타 출신의 경제학자를 기용하여 

그들의 조언을 들었다.


한국으로 치면 문재인이 뒈지고 김정숙이 대통령이 되어 

김상조가 시키는대로 한다는 의미다. 지옥의 스멜이 나지?



2. 1975년: 헬게이트가 열리다

이사벨 페론은 두 명의 남성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나는 복지부 장관 자리에 앉아 뒷구멍으로는 

비밀경찰을 운영하며 반대파를 암살하던 호세 로페스 레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경제부 장관 셀레스티노 로드리고였다.



로드리고는 후안 페론에 의해 중용되었던 사회주의 경제학자였다. 

소득주도 경제성장 모델을 내세우던 인물로 

후엔 페론의 포퓰리즘에 중요한 사상적 기초를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더구나 로드리고는 레가가 추천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사벨은 로드리고가 시키는대로 충실히 따랐다.


▼연설하는 이사벨 페론과 호세 로페스 레가



하지만 당시 아르헨티나는 이미 과도한 정부 지출의 악영향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무리 월급을 올려주어도 물가가 그 이상으로 치솟는데다가 

아르헨티나의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를 맞아 경제부 장관 로드리고는 

정부 지출을 줄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소득주도 경제성장'을 더 밀어붙인다. 

Rodrigazo는 바로 1975년 5월 로드리고가 실시한 소득주도 경제성장 정책들을 일컫는 말이다.

로드리가소의 주요 골자는,


1. 노동자들의 소득을 더 높임

2. 페소화를 평가절하

3. 연료에 매기는 세금과 대중교통비를 올림


이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소득을 계속 올리는 대신 외화를 확보하기 위해 (수출에 유리한) 화폐 평가절하를 감행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국가 재정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세금과 대중교통비를 인상한 것이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에서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불과 한달만에 물가상승률은 35%를 기록했다.

게다가 재정적으로 취약하던 기업들은 불과 한달만에 줄도산을 냈다.

거기에 대중교통비 등의 체감경기까지 갑자기 나빠지자 

엄청난 경제난의 위험을 감지한 아르헨티나인들은 페론 정부에 맞서 반대 시위를 벌였다.

(페로니스타 포퓰리즘 정권에서는 최초의 반정부 시위)



그 부작용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이사벨 페론은 당황하여 레가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로드리가소를 7월에 폐지했다.


정부 내부에서도 비판이 너무나 거셌기 때문에 

이사벨은 서둘러 경제부 장관 자리에서 로드리고를 해임하고 

로드리가소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레가로 하여금 

복지부 장관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도록 했다. 

그리고 레가를 스페인 대사에 임명하여 해외로 보냈다. 

그렇게 하여 비판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그러나 레가가 스페인으로 떠난다는 사실은 이사벨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사라진다는 의미와 같았다. 

권력에 도전하는 시도가 발생할 점을 몹시 우려하던 레가와 이사벨은 

궁리 끝에 많은 지지를 얻던 합참의장 알베르토 누마 라플라네 장군을 해임했다. 

그 후임으로는 카리스마 없는 소위 '똥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을 임명했다.



▼Jorge Rafael Videla



3. 1976년: 지옥의 시작

한편 이사벨 페론 치하의 아르헨티나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물가는 계속 상승하고 있었고 상공업은 계속 운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포퓰리즘 꿈을 버리지 못한 민중은 

"월급을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올리면 되지 않느냐"는 

개돼지다운 주장을 펴며 시위로 소일하고 있었다. 

거듭되는 반정부 시위 속에서 이사벨 정권은 완전히 마비되고 있었다.


한편 라플라네 장군의 옷을 벗김으로서 

군부의 쿠데타 시도를 막았다고 생각하던 이사벨의 의도와 달리 

실은 그 똥별 비델라 장군이 진짜 야심가였다. 

그는 정치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걸 숨길 줄도 아는 인물이었다. 

고려시대 정중부처럼 조심스러운 성격의 비델라는

해군의 에밀리오 마세라 제독, 공군의 올란도 아고스티 준장을 포섭하여 

연합군사정부(훈타: junta)를 구성한다. (CIA가 지원했다는 설도 있음)


그리고 훈타는 이사벨 페론 정권의 경제적 무능을 규탄하며 

공산주의 게릴라에게 나라가 먹힐 것이라고 주장하며 

1976년 3월24일 쿠데타를 일으킨다. 

육해공 3군이 모두 가담한 훈타에 맞설 세력은 없었고 

비델라는 간단히 권력을 탈취한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 대행에 오른다. (표면적으로는 훈타가 통합권력기구이고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없음.) 

이사벨은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아르헨티나 훈타: 왼쪽부터 마세라 제독, 비델라 장군, 아고스티 준장



훈타는 이사벨 페론에게 실망한 민심을 거둔다는 명목으로 

후안 페론이 했던 것 같은 포퓰리즘을 답습했다.

그래서 칠레와 달리 아르헨티나는 군사정권 때 경제발전을 거의 겪지 못했다.

게다가 페로니스타 정부와 대립하던 좌익 게릴라들의 활동이 심해지자 

훈타는 Dirty War로 알려진 대테러진압 작전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거나 살해했다. 

Dirty War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고 싶다. 

아무튼 경제난에 Dirty War까지 겹쳐져 아르헨티나는 진정한 지옥을 맛보게 된다.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아르헨티나 훈타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정권의 사활을 걸고 

자국팀을 우승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심판 매수, 스케쥴 조작, 금지약물, 협박 등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모든 일을 다 했다. 

그 덕분에 1978년 월드컵은 개최국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축구시합에서의 짧은 기쁨으로 아르헨티나의 지옥을 모두 덮을 수 없었다. 

후안 페론, 이사벨 페론, 그리고 훈타를 거치면서 아르헨티나의 체질로 굳어버린 

포퓰리즘 정치는 아직도 아르헨티나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4. 후일담


호세 로페스 레가는 철저히 사람들을 피해 살았다. 

스페인에서 파파라치들에게 모습을 들키게 되자 스위스로 도망쳤다. 

그리고 1986년,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도망쳤는데 

그때에는 레가가 아르헨티나에서 저지른 암살 등의 혐의로 이미 기소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레가는 미국에서 체포되어 아르헨티나로 송환되었다. 

그리고 재판 도중에 당뇨병이 악화되어 1989년 사망했다.


이사벨 페론은 현재까지도 살아있다. 

레가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재임 시절 저지른 범죄로 2007년 체포되었으나 

이미 고령이고 (게다가 허리 골절로 제대로 걷지도 못함)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로 재판을 사면해주었다. 




1976년 권력을 잡은 훈타는 

비델라의 뒤를 이어 로베르토 비올라 장군, 칼로스 라코스테 제독, 레오폴도 갈티에리 장군으로 

계속 권력을 세습하면서 철권통치를 유지했다. 

그러나 갈티에리가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하면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도 종말을 고했다. 

영국군은 화친의 조건으로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사퇴 및 민주 선거를 요구했으며 

결국 훈타는 선거에서 패배하며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훈타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재판에 회부되어 그간 저질렀던 인권유린 범죄에 대한 재판을 받았다.



▼유죄를 선고받은 비델라



포클랜드 전쟁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킨 인물은 마거렛 대처 총리이다. 

외세가 남의 나라 정치에 간섭했다고 지랄하는 꼴통은 없겠지?


아르헨티나 축구 국대팀은 1986년에도 우승을 달성한다.


소득주도 경제성장의 전도사 셀레스티노 로드리고는 1987년 세상을 떠났다.


소득주도 경제성장이라는 개지랄을 1978년도 아니고 2018년에 재현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1978년 월드컵 우승에 사활을 걸었던 아르헨티나처럼 

어떻게든 동계올림픽을 통해 개돼지들의 시선을 돌리려 했으나 실패했다. 






출처: 1975년 아르헨티나: Rodrigazo에 대해 ARABO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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