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아주 귀한 책을 입수했다.
로물로 베탕쿠르(Romulo Betancourt)의 'Venezuela: Oil and Politics(석유와 정치)'라는 책이다.
이 책의 가치를 알기 위해선 먼저 베탕쿠르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야겠지?
로물로 베탕쿠르는 베네수엘라의 정치인이었고 대통령직을 두번 역임했다.
파란만장한 경력의 소유자로 젊었을 때에는 법대생이었는데 공산주의 게릴라로 활동하다가
1945년 쿠테타로 집권했지만 1948년에 쿠데타로 쫓겨났다.
그 후 망명 생활을 거쳐 다시 귀국하여 야당 정치인이 되었고,
이후 1959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두번째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리고 베탕쿠르 자신이 쿠데타로 집권했던 인물이지만
남미의 경제발전을 막는 요인은 군사쿠데타라는 점에 착안하여
어떤 이념이든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은 지지하지 않겠다는
소위 '베탕쿠르 독트린'을 내세워 미국의 최우방이자 카리브해의 맹주로 떠올랐다.
도미니카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와는 앙숙 관계였고
트루히요는 베탕쿠르를 수차례 암살하려 했다.
(▼도미니카 비밀경찰이 폭파한 베탕쿠르의 자동차)
국가 발전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로 치면 박정희 대통령급의 인물이다.
베탕쿠르는 베네수엘라가 석유 밖에 가진 게 없는 나라라고 보았고
유일하게 하나 있는 자원인 석유를
어떻게 팔아서 최대한의 이익을 볼 수 있는지 연구했다.
목축과 농업에만 의존하던 베네수엘라 경제를 고치고
전국을 고르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석유에서 얻는 절대적으로 이익이 필요하며
외국계 기업을 몰아내서도 안되지만
외국계 기업에 의존해서도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석유 국영기업 설립에 노력한 인물이었다.
후진국의 경제 개발에는
국가가 상당 부분 개입해야 한다는 점을 내세웠다는 점에서도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하다.
공산주의 게릴라 출신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굳은 친미노선을 고수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길을 모색했다.
특기할 점은 베탕쿠르는 OPEC이라는 개념을 창시한 인물이기도 하다는 점.
베탕쿠르는 선진국들의 자본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산유국들이 뭉칠 필요가 있다는 국제협력 가설을 세웠는데
이게 나중에 OPEC의 창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처럼 대단히 학구적인 인물로
첫번째 대통령 임기에서 쿠데타로 쫓겨난 다음에는
해외에 망명하면서 자신이 배운 국제학 지식과 베네수엘라의 현실을 접목하려 애썼으며
정치 혼란을 최대한 막는 방법을 연구하여 발표했다.
이 책 Oil and Politics도 망명 기간 중에 쓴 책인데,
지금은 베네수엘라 근대사를 집대성한 대작으로 꼽힌다.
유연한 균형감각의 소유자로 그가 1981년 죽었을 때에는
레이건 대통령도 "미국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 부를 정도로 애석해했다.
'베네수엘라의 박정희' 베탕쿠르는 과거의 인물이지만
그에게서 배울 점은 아직도 많다고 본다.
왜냐하면 베탕쿠르는 군사정권과 지방 군벌(caudillo)들의 대결로 갈라진
베네수엘라를 강력하면서도 유연한 통치로 바로잡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는 문재인 때문에 갈갈이 분열된 지금의 한국이 베탕쿠르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첫 장을 읽기 전에, 서문(foreword)을 읽다가
베네수엘라와 한국이 너무 똑같아서 가슴이 콱 막히는 듯 했다.
베탕쿠르가 전례 없이 다재다능했던 '천재형 리더'였기 때문에
베네수엘라는 강력한 지도자에 의존하는 큰 정부 정치가 유행하게 되었고
이것이 우고 차베스-니콜라스 마두로로 이어지는 포퓰리즘 독재정권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베탕쿠르 같은 지도자를 아예 가져보지 못한 나라들은
그냥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치적 혼란이 덜한데,
베네수엘라는 너무 뛰어난 지도자의 역량을 경험한 탓에
항상 강력하고 전지전능한 정부를 바라게 되었다는 소리. 이거 한국과 너무 똑같지 않은가.
아 시발 가슴이 답답하다.
이제부터 베탕쿠르의 저서를 직접 읽겠는데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이건 읽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한국에 적용 가능한 부분이 있으면 일베에 올릴 생각이다.
뜻있는 게이들이여 부디 베네수엘라로부터 얻는 교훈이 헛되지 않게 해달라.
원래는 여기까지만 쓰려고 했는데
기왕 베네수엘라 역사를 소개하게 되었으니 1장 내용도 그냥 여기에 올릴게.
경건한 마음으로 1장을 읽기 시작한다
제목에 있는 카스트로와 고메스란,
베네수엘라의 군사독재자였던 시프리아노 카스트로(Cipriano Castro)와
그의 후계자 후안 비센테 고메스(Juan Vicente Gomez) 두명을 의미한다.
시프리아노 카스트로는 본래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국격 지대의
거대한 농장주 출신이었는데 당시 커피값 폭락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1899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농장주 출신이었던 카스트로 휘하의 군대는 늘 부족했고
카스트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대를 증강시켜야 했다.
그리고 군대를 늘리기 위해 외국계 기업으로부터 빚을 존나게 많이 졌다.
하지만 부채가 늘어나도 군사력으로 권력만 유지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대한제국의 돈키호테 고종 아니면 서울시 재정 말아먹고 중국계 자본에게 손벌리는 박원순 같은 새끼였다.
이 아재가 카스트로.
생긴 것도 뭔가 고종 닮았다
영국 기업과 독일 기업에게 탈탈 털리는 카스트로를 풍자한 그림
카스트로 시절에는 카우디요(군벌)들이 카스트로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마치 삼국지에서 제후들의 동탁 토벌이 실패했던 것처럼
반 카스트로 군벌들은 단결하지 못했고 결국 내전은 카스트로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카스트로도 외국계 기업들에게 막대한 빚을 진 후였다.
카스트로의 고향은 수도 카라카스를 기준으로 보면 7시 지역이다.
그 7시 근성이 발동했는지 카스트로는 영국과 독일 기업들에게 돈을 안 갚겠다고 썡깠다.
두나라 정부는 몹시 빡쳤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점잖게 제3국의 중재를 통해 해결하자고 했다.
하지만...카스트로는 거부했다.
결국 1902년, 두 열강은 군대를 보내어 (신미양요처럼) 베네수엘라의 항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당황한 카스트로는 이번엔 자기가 미국 정부에 중재를 요청했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은 다름아닌 '거대한 빠따를 들고 부드럽게 말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영국과 독일은 미국의 중재에 시큰둥했으나
양국 해군이 너무 화력을 발휘하는 바람에 베네수엘라 상선 두척이 침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일로 여론이 나빠지자 영국과 독일은 보상금의 의미로서
앞으로 베네수엘라에 수입되는 영국과 독일 제품에 매기는 관세의 30%를
되돌려주기로 합의를 보고 철수했다.
베네수엘라인들에게 쪽팔리는 사실은
이 회담 때 카스트로 정권은 끼지도 못했다는 점.
어디까지나 미국 정부가 카스트로 정부의 대리인 자격으로
영국과 독일 상대로 직접 협상을 했다.
(북핵문제에 끼지도 못하는 문재인 같노 ㅉㅉ)
당연한 일이지만 전쟁의 패전으로 카스트로 정권의 인기는 운지했고 게다가 물가마저 폭등했다.
카스트로는 반란 시도를 항상 무력으로 진압했고
그 결과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랬는지 결국 카스트로도
하라보지 따라오라는 노짱을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1908년, 카스트로는 요양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떠났는데...
그의 부하 고메스가 통수를 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턱수염을 기르고 앉아있는 사람이 카스트로. 서있는 사람이 고메스)
고메스의 집권 때, 베네수엘라는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탈피했다.
그러나 새로운 국제질서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 카리브해는 미국의 뒷마당이며
자신들은 싫으나 좋으나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한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루즈벨트는 카리브해 각국이 미국에 진 빚을 연기해주는 대신
내정간섭을 미국정부의 당연한 권리라 주장했다.
만일 미국에 반기를 들면 미군은 '빚을 받으러' 쳐들어간다.
이게 루즈벨트식 외교였다.
당연히 빚더미에 앉은 베네수엘라는 찍소리도 못했다.
오죽하면 미국 정부가 '민주주의를 위해' 고메스에게 1914년의 대선에 출마하지 말라고 하니까
고메스는 어쩔 수 없이 대선 후보에서 사퇴하고 자신의 심복들을 대선 후보로 내보냈다.
1914년부터 1922년까지는 꼭두각시 대통령들의 시대였다.
후안 비센테 고메스. 별명은 메기(The Catfish). 수염이 메기 수염이라서.
메스는 1922년 다시 대선 후보에 출마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사실 고메스도 카스트로가 남긴 막대한 부채를 어떻게 해결할지 아무 대책도 없었다.
하지만 운빨은 더럽게 좋았다.
1918년에 마라카이보 호수에서 유전이 발견되었고
유전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했기 때문이다.
고메스는 리듬타는 노짱처럼 신났다.
그리고 막대한 석유 수입을 가지고 근대적인 군사독재 체제를 굳히기로 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막대한 무기를 수입해왔고 강제로 군벌들을 해체시켰다.
아이러니하지만 베네수엘라에서 군벌 정치가 사라진 것은 고메스의 강력한 독재 덕분이었다.
김정일의 선군정치처럼 군대를 최우선으로 챙긴 고메스는
역시나 김정일처럼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카라카스를 기준으로 7시 지역에 해당하는
안데스 산맥에서 노예들을 부리며 농장을 경영하던 고메스는
한국 7시 지역의 염전 주인들처럼 매우 난폭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반대파들을 처형할 때 교수형이 아니라 고환을 묶어 죽을 떄까지 나무에 매달았다고 한다.
고메스는 우민화 정책을 실시하던 남미 최초의 독재자이기도 했다.
그는 수도 카라카스 이외의 지방을 차별했고 공립학교도 거의 짓지 않았다.
그는 "어리석어야 순종한다(Ignorant and docile)"는 명언을 남겼다.
경제에 대한 안목은 없었으나 권력 유지에 대한 철학만은 확고했다.
고메스 시대는 석유의 발견으로 큰 풍족을 누릴 수 있었으나
동시에 베네수엘라 경제가 또 얼마나 취약한가를 증명했다.
1929년에 미국발 대공황이 닥치자 베네수엘라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에 시달렸다.
물론 고메스와 그를 지지하는 엘리트 집단은 막대한 재산을 빼돌렸다.
이 재산으로 군부를 중심으로 한 지지 세력을 계속 단결시켜 죽을 때까지 권력 유지에 성공했다.
고메스는 1935년 죽었지만 베네수엘라에서 군사독재의 전통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다.
베탕쿠르는 어떻게 자신의 조국을 고칠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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