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 진열장/여러정보들 집합소

조선의 군사 혁명과 멸망 '17세기의 위기'

by JiNan's 2021. 9. 26.
반응형

소빙하기(Little Ice Age)의 절정은 동아시아에 많은 변화─왕조의 교체, 대기근 등─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만주(Manju) 세력은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조선은 한낱 북방의 오랑캐로 치부하던 만주에게 굴복당하고 말았다.

더 충격적인 것은─성리학적 사고 방식으로 점철된 정신 병자 왕국─
조선이 그동안 '천조국'이라 부르던 종주국인 명(明) 제국이
만주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는 소식이었다.

아포칼립스(Apocalupsis): 세계의 멸망

대명 제국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조정에 출사하지 않는 관료나 선비들이 생겨났고,
─조선왕조실록의 표현을 빌리자면─조선은 이 시기를 '인류와 세계가 무너진 재앙'이라 명명했다.

이렇듯 조선 사회가 직면한 '17세기의 위기(The Crisis of the 17th Century)'는
실제적인 관점에서 조선 사회에 병자호란과 대기근이라는 충격을,
관념적인 관점에서 자신들이 구축한 성리학적 세계관의 붕괴라는 충격을 선사하였다.

그렇지만 아직 17세기는 끝나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나라와 낡은 체제를 이끌고 조선은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늙은 왕조 조선이 항구적이지 않은 낡은 체제와 반신불수의 몸을 이끌고
17세기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그럼에도 움직여야 한다.
전란과 대기근으로 사람이 죽었어도, 세계가 무너졌어도, 기형적인 제도가 나라를 썩게 해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광해군의 '잃어버린 15년 통치기'는 조선 사회에 건전하지 못한 체제를 고스란히 남겼다.
거대한 토목 공사로 인해 국가 재정은 거의 파탄났고, 광해군 집권 말년에는 '망국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광해군의 내치 · 경제는 조선을 김대중 · 노무현 못지 않게 망국의 수준으로 만들어버렸고,
광해군의 업적으로 알려진 '대동법'도 본인은 정작 거부하거나 회의적입 입장을 내비쳤다.

명저 '중국의 서진(China Marches West)' 집필가, 미국 역사학 교수 피터 퍼듀

대외 정책도 잘했느냐? 하면 사실 높은 점수를 줄 수가 없다.
청의 침입은 조선의 외교 정책도 고려해야 하지만, 소빙하기로 인한 청의 경제적 위기도 고려해야 한다.
여기까지 설명하면 글이 난잡해지므로 추후에 설명하겠다.

청의 침입과 병자호란의 원인을 조선의 외교 정책이 아닌,
당시 소빙하기와 맞물려 '경제적' 관점에서 설명한 '중국의 서진(China Marches West)'이라는 책이 있으니,
추후에 필자가 정리해서 일베 정보글에 올려보겠다.

대중 매체의 영향으로 거의 노무현급으로 미화된 광해,
하지만 최근에 다시 '암군'과 '혼군'으로 재평가되고 있으니, 그나마 고무할 만한 좋은 현상이다

인조는 즉위하자마자 광해군이 남긴 '건전하지 못한 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나섰다.
우선 광해군대 온갖 비리의 온상이었던 12개 도감을 폐지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던 조도사 6명과 제주 목사의 처형을 명했다.

또한 백성에게서 거둘 예정이었던 원곡 11만 수천 석의 빚을 모조리 삭감했는데,
인조 말년 공식적인 공물가 원곡의 총량이 5만 석이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때 삭감된 양은 대단히 많은 것이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급한대로 이런 조치를 통해서나마
광해군 정권의 '일탈'을 '정상화'해야 했다.

국가 운영 면에서는 광해군보다 확실히 나았는데,
자기가 친 사고를 보며 통곡하거나 개선해야 한다는 의식도 가져서,
1623년 즉위 초의 대동법 개정, 1633년 상평통보 발행과,
1634년 삼남 지방의 양전과 군사 개혁 같은 업적을 남겼다.

사실 대외 정세에 대해서도 서인 세력이나 양반 선비들보다는
인조 '개인'의 판단력이 우월한 수준이었다.

인조 때 상평청의 설치와 상평통보 유통 시도
1625년(인조 3), 동전 60만 개 주조

온갖 덧칠된 이미지─친명배금정책, 대명사대주의자─로 인해
인조의 정책이 성리학적 세계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인조는 상평통보의 발행과 상업의 발달,
군사적 · 경제적 목적에서의 수레와 화차의 적극적 운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화폐 사용 경험의 부족과 화폐에 대한 불신은
이 일련의 개혁 작업들이 항구적인 정책으로 정착하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특히 국내 시장이 발달하지 못한 조선의 경제적 여건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인조의 관심사는 '군사적'인 부문이었는데, 조선 후기 5군영 중 3개 군영은 인조가 창설한 것이다.
인조는 즉위하고 나서 북방의 만주 세력의 급속한 팽창으로부터 국경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15,000여 명의 전략적 예비 정예 병력인 '북방군'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 · 정묘호란 ·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군사적 패배는 심화되었고,
인조가 실시한 군사적 성과가 있었음에도 전투의 향방을 바꾸지는 못했다.

필자가 조선왕조실록 인조편을 2번 정독해서 파악했는데,
사실 이 근본적인 기저에는 조선의 태생과 관련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작용한다.

인조는 평소 관료나 군인들과 군사적 논의를 즐겨 했는데,
논의의 주된 핵심 사안은 일맥상통하다.

조선의 상업이 미성숙하고 근본이 가난한 나라라 물산과 재화가 없고,
또한 국경 지역의 수비군을 유지할 군량조차도 부족한 상태였다.

나름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조는 섬에서 둔전을 시행하고,
삼남 지방의 양전 사업을 개시하였지만,
조선의 태생이 가난하거니와
더군다나 광해군이 물려준 '건전하지 못한 체제'는 모든걸 악화시켰다.

병자호란 이후의 인조는 국가 재정 규모의 감축, 긴축 재정의 실시, 세금 부담의 완화를 추진했고,
'여민휴식'을 모토로 사회 경제적 안정에 매진했다.

중국이 왕조 교체라는 격변으로 이상 저온의 충격을 가장 강하게 받은 1640년대를 무사히 넘기고는
조선에서는 제도사적으로 의미있는 논의들이 이뤄진다.

그리고 인조 말년에는 전후 복구책이 성공하여 경제력이 크게 성장한 상태였다.
인조가 구축한 성공적인 업적은 효종이 계승하였고, 이런 기사가 나올 정도다.

"최상의 말을 타고, 맛나고 기름진 음식을 먹는 풍조가 서울 고관뿐만 아니라
시정의 하층민들에게까지 만연하고 있다."

인조는 농민들의 부세 부담을 1/3로 낮추는 과감한 경세 정책과
산림과 천택의 전면 개방, 형벌 완화 등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어 중흥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오히려 하층민들의 사치 낭비 현상이 심화되긴 했지만,
아무튼 인조의 이런 자유주의에 가까운 조정의 태도는 민간의 중흥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후 명의 부흥을 외치며 청을 정벌해서 중원을 차지하자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선비들의 입에서 나왔는데,
인조는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강하게 반박하였다.

"오늘날 유자(선비)들은 아직도 헛된 망령에 사로 잡혀 천조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한다.
천조의 부흥을 누가 바라지 않겠냐마는 아직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이게 오늘날 대다수 지식인층의 여론이라면 국가의 장래가 어둡구나."

인조는 북벌을 위한 군사력 양성보다는,
적어도 혹시 모를 청의 침입에 자국을 완전히 방어하기 위한 자구책에 골몰했다.
그리고 인조 말년부터는 정조 때까지 조선의 지나친 군사주의화가 이루어졌다.

사실 효종도 청의 국력이 워낙 강대했음을 알고 있었고,
실록의 기사에 의거하면 효종은 진짜 북벌을 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자신의 아버지 인조처럼 청의 재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성격의 수세적 방어에 초점을 맞춘다.

조선 후기에는 계속해서 군사주의화가 이루어져,
18세기 초 조선군의 총 병력 104만 명 중,
경안(京案)에 오른 67만 5773명을 제외한 외안(外案) 등 각 지방의 군사는 35만 5200명이었다.

이중 속오군은 18만 8000명, 순아병은 14만 1900명, 모군사졸은 2만 53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 5군영의 상비군 규모는 10만 명을 넘어섰다.

또한 당시 국가 권력은 대규모 전쟁에 대비한 보병 중심의 전술 체계 하에서
노비 등 천민을 비롯한 하층민 일반을 군사로 원활하게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자 노력했다.

조선 후기의 군사적 논의에서 재미있는 대목은,
1) 청천강 이북에는 여성도 동원하여 국경 방어
2) 양반 사대부부터 노비까지 일정한 연령이 되면 군역을 꾀하는 '징병제'의 시행
이 논의되었다는 것이다.

중앙 정부 차원에서 제기된 논의인데,
1)안과 2)안은 지방 양반 사족의 격렬한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조선에 충격을 가져온 경신 대기근

당시 조선의 군사주의화가 얼마나 심했냐면,
경신 대기근이 일어났을 당시 17세기 후반 조선의 중앙 정부 총수입이 789만 냥에 달했다.
그런데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중앙 정부는 780만 냥의 구휼액을 소진하였는데,
1년치 중앙 정부 총수입을 구휼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남아 도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총포 제작과 염초 생산,
군사 훈련이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영 · 정조 시대까지도 조선은 청의 침입을 경계하고 있었다.
국왕의 주도하에 대규모 군사 훈련이 계속해서 진행되었고,
시가에서 수만 명의 군사를 친히 사열하고 진법 훈련을 하는 등
청의 군사적 침입 시나리오에 맞추어 군사 훈련을 진행했다.

이러한 군사적 변화에 있어서 위정자들의 주관심사는 '조총과 화약 무기'였다.
훈련도감 등 국가 기관과 개인의 노력에 힘입어, 조선 후기의 화기 개발은 상당한 수준에 달했다.

1625년(인조 3) 무렵 조선에서 생산된 조총이 일본의 것보다 더 우수하다는 자신감까지 표명되었고,
숙종 무렵에는 심지어 청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의 조총 및 화약 제조술을 배우고자 할 정도였다.

청의 요청으로 조선군 포수가 파병되어 진행된 '나선 정벌'

1627년(인조 5)의 연간 조총 생산량은 1천 정이었으나
그로부터 10년 후인 1636년(인조 14)에는 그 2배인 2천 정 이상을 생산하고 있었다.

1641년(인조 19)에는 조선이 보유한 조총은 이미 5만 정을 넘어섰으니,
생산량의 증가는 자연스럽게 조총 생산에 투입되는 비용 내지 가격의 인하로 연결되었다.

가령 광해군 무렵 조총 1정의 가격은 면포 15필이었는데, 1625년(인조 3)에는 10필,
1649년(인조 27)에는 8필로 지속적으로 인하되는 추세를 보였다.

또한 신무기의 개발도 이루어졌는데,
숙종대 기존의 조총보다 사정거리가 10배 정도 더 긴 천보총을 만들었고,
1679년(숙종 5)에는 50개의 조총이 일제히 발사되는 화차를 개발하여 숙종 앞에서 발사 시범을 보인 바 있다.

그리고 조선 전기에 제작된 신기전, 화차 등 여러 대형 화기들이 활발히 제작되었다.

극렬한 조선까였던 중상학파 박제가 선생도
"우리나라의 화약 무기와 기술은 동아시아에서 으뜸이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조선의 조총 생산은 활발하여 아예 청과 일본에 수출하기까지 하였고,
조총 수출로 인한 수입은 은 1백만 냥이 넘었다.

그러나 지나친 조총 제작과 판매가 '민간 영역'에서도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암묵적으로 총기가 불량으로 유통되었고, 아예 시장이나 가게에 대놓고 팔기도 하였다.

그리고 '총기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최근 화약이나 탄환, 총기 등을 가게에 벌여놓고 마음대로 파는 사람들이 많으니,
심지어 계(契)를 조직해 도매까지 하고 있습니다."

1814년(순조 14) 영의정 김재찬의 소

아이러니한 부분은 17~19세기 조선 · 청 · 일본의 행보가 사뭇 상이하다는 점이다.
제일 먼저 조총을 받아들여 센고쿠 시대를 마감하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에도 막부 시대에 조총의 제작이 급격히 쇠퇴하였다.

센고쿠 시대 조총의 주된 생산지였던 쿠니토모무라의 대장간들은 거의 몰락해갔다.

에도 막부 하의 일본에서 조총은 점차 사회적으로 하위 신분에 속한 사람들이나 사용하는 것으로,
이를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은 '사악한 자'로 인식되었고,
화기를 제조하거나 개발하는 것을 자신들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한편 청나라에서는 준가르를 굴복시킨 뒤 화기의 연구와 개발을 금지시켰고,
종래 만들어진 병기에 관한 서적들도 모두 금서로 지정하여 일반인들의 열람을 제한하였다.

옹정제는 민간에서 조총과 화약을 보유하는 것을 엄금하였으며,
건륭제는 조총을 사적으로 제조하는 자에게 채찍 100대를 때리는 형벌을 제정하였다.

도광제 시대에는 화약 10근 이상을 제조하는 자는 참수형과 책형으로 다스렸고,
그 부인과 자식들에게는 연좌제를 적용하였다.

청나라 시대 책형

강희제는 '우리나라는 전쟁에서 천하무적이었다. (중략) 이것은 오로지 궁시와 창에 의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옹정제 또한 '만주는 옛날부터 기사를 중시하였으니, 조총만을 익히고 궁시를 폐하는 것은 행할 수 없다.'라 하였다.

아예 건륭제는 냉병기의 사용을 강조하고 팔기 기병들의 훈련장에 이와 같은 조상들의 유훈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일련의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17~19세기 청과 일본에서는 중앙 정부 차원에서 화기의 생산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은 150년 동안 화기 생산에 골몰하였고,
조선군 전체 병종에서 포수와 화기 전문 병종의 비율이 80%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조선은 인조 때부터 정조 때까지 나름 군사적으로 의미있는 논의를 전개하면서,
군사력 강화와 화기 개발에 골몰하였으나 19세기에 시작된 세도 정치는 모든걸 무너뜨렸다.

또한 청과의 안정적인 관계가 이어지면서 청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군사력이 해체되는 지경에 달한다.

조선 후기에 다시 시작된 '장기간의 평화'는 그동안 비대해진 군사력의 해체를 유발하였다.
특히 세도 정치 집정자들은 화기의 생산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는데,
그들은 화기의 생산을 자신들의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정조 때까지 비대해진 수십만의 조선군은
세도 가문들이 자신들의 정권 유지만을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겨두고 점차 폐지해나갔다.

그리고 그로 인한 경제적 잉여 자금은 자신들의 가문을 위해 축적하였고,
세도 정치로 축적된 조선의 사회 · 경제적 문제와 더불어
조선은 지울 수 없는 온갖 병폐와 멍에를 안고 '서구의 충격(Western Impact)'을 맞이하게 된다.

일본은 에도 막부 시대 때부터 서양과의 접촉을 통해 나름 소통을 하고 있었는데,
근대화에 유리한 내재적 조건과 함께 서구화에 성공하여 제국주의로 성장한다.

조선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느냐? 하면 사실 필자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애초에 조선은 근대화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지도 못했는데,
인구 · 영토 · 자본 · 생산 · 기술 · 자원 모든 면에서 열악했다.

반면 일본은 그런 내재적 조건에서 조선보다 유리하였다.

세도 정치 이후 성리학적 병폐를 안고 있던 조선 사회는 일본 제국의 침략에 노출되었고,
1910년 합방 조약에 의해 조선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장기간의 오랜 평화로 안보 의식의 해이는 물론이요,
현재 집정자가 적국 북한과 협력하고 있는 현재 진행중인 오늘날 대목에서
왜 19세기 조선 사회가 떠오르는 것일까.

<3줄 요약>
1. '17세기의 위기' 이후 조선 사회는 청을 가상 적국으로 규정하였다.
2. 이에 근거하여 군사적 변화와 기술 개발을 꾀하였다.
3. 그러나 세도 정치 과정에서 쇠퇴하고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제국의 침략에 의해 멸망하였다.

<참고 자료>
- 김종수,『훈련도감 설치 및 운영의 동아시아적 특성』
- 김성근,『19세기 중엽 일본의 정치적 변동과 군사 기술의 변화 - 내전과 소총 기술의 발달을 중심으로』
- 노영구,『'군사혁명론(Military revolution)'과 17~18세기 조선의 군사적 변화』
- 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
-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자료 참고
- 조선왕조실록
- 나무위키, 위키백과 자료 참고




출처: [역사] '17세기의 위기' 이후 조선의 군사 혁명과 멸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