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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진열장/Fact 모음

교과서에서는 알려주지않는 임진왜란의 이면

by JiNan's 2019.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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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의병장이 남긴 '쇄미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왜군이 쳐들어 왔는데, 아랫 것들은 하나도 안 보이고 오히려 일본군을 환영해줘서 걱정이다."
아예 대놓고 일본군에 가담한 조선 백성들도 적지 않았으니 당시 선조는 윤두수(尹斗壽)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왜군의 절반이 조선 백성이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 (선조실록 25년 5월4일)
선조는 “내부(內附·요동에 가서 붙는 것)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라고 거듭 만주로 도망갈 의사를 밝혔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
강항이 쓴 "간양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적선 6,7척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고, 각 배에는 조선인과 왜병이 반반씩 차지하고 있었다"


1607년, 1617년, 1624년에 조선통신사들은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을 데려오겠다는 취지로
'쇄환사(刷還使)'를 파견하다.


쇄환사는 6000명 가량을 조선땅으로 데리고 돌아왔으나,
이는 전체 포로 숫자의 10%도 안되는 수치였다.
조선인들 스스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던 것도 커다란 이유였다.
전쟁이 끝난지 10년, 20년이 지나
이미 일본 땅에서 정착해 살아가던 조선인들에게는 오히려 거부감만 들었던 것이다.

 

 

이런 자료는 우리 나라 문헌에도 많이 남아 있다. 
1617년(광해군 7년)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경직은
'부상록'이라는 문서를 통해 놀라움을 전했다.
"돌아가자고 하면 얼른 따라올 줄 알았던 사람들이 당최 나서려 하질 않았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 중에서 양반의 수는 10% 남짓으로 적었고
나머지는 조선으로 돌아가도 다시 천대받는 노비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 당시 일본 통신사로 간 강홍중의 '동사록'에서도 나온다.
"일본에 붙잡혀 온 사람들은 처음에는 맨손으로 왔지만, 십년 가까이 지내면서 재산을 축적하고 생활이 편해져서 좀처럼 돌아가려는 이들이 없었다."
임진왜란이 끝난후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가서 끌려간 도자기공들에게

조선으로 귀향을 설득하지만 대부분의 도공들은 귀환을 거부한다

조선사회는 소위 말하는 "사농공상" 이라고 하여 도자기 생산을 포함한 모든 공업 장인들을 하대하고

소위 권력을 잡고있던 세력만이 득세하던 사회였고
마찬가지로 일본도 농공상의 계급체계와, 계급간 분리가 뚜렷하였으나

일본에서의 계급분리는 차별이 아닌 분업의 개념이였으며, 도자기 장인들도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며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 장인들은 막부의 지원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할수 있었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봐야 자신들을 하대하는 양반들을 위해 도자기를 만들어내야 했기 때문에 조선으로의 귀향을 거절했다고 한다.

 

 

 

 

 

 

출처: 교과서에서는 알려주지않는 임진왜란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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