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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의 난, 청나라의 똥꼬쇼, 그리고 문재인 보유국

by JiNan's 2019.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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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에서 쌍코피 터지고 서양 열강들의 힘을 깨닫게 된 청나라.



청나라 조정은 서양 각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고 

이것은 '양무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청나라의 비효율적인 관료제나 국민성을 고치지 않은 상태에서 

서양의 문물만 져오겠다는 발상은 실효를 거두기 힘들었고



청나라 조정의 과도한 서양인 우대 정책은 중국 사회 내부에서 반발을 낳게 된다.

(일본의 장점을 설명하면 일뽕 타령을 하는 새끼들이 나오는 것처럼.)



게다가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양무운동은 급속도로 속도를 잃게 된다.

그렇게 투자를 했는데 서양은 고사하고 옛날에 해적질이나 하던 놈들조차도 못 이기니 무슨 의미가 있냐는 절망감이었다.

당시의 황제는 광서제였는데 

(대원군에게 맞서 개방 정책을 추진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고종처럼)

양무운동에 자신의 정치인생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광서제는 청일전쟁의 패전 직후 그의 이모 서태후가 주도한 양무 운동 배격에 밀려 실각하고 만다.

서태후는 권력을 위해 행동하는 순발력은 뛰어났지만 큰 흐름을 읽는 안목은 없었다.

그 점에서는 모택동과 비슷한 유형이었다. 

그리고 모택동과 비슷한 유형이 권력을 잡으면 국민들은 불행해진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하던 모든 것을 '적폐'로 몰고 싶었지만 서양인들이 가진 힘을 알고 있었기에 일단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청나라는 다들 알다시피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다.

복부 지역은 만주족이 평정했지만 남부 지역의 한족들은 '단(團)'이라는 일종의 민병대를 조직했다.

단에서는 자체적인 무술 훈련을 실시했으며 반청운동의 기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만주족의 지배가 지속되자 반청운동을 포기한 단들은 청나라 조정에 협력하면서 특권을 얻으려고 했다.

청나라도 이이제이 원칙에 따라 한족 단에게 약간의 자치권을 허용하면서 한족들을 단속하게 했다.



말이 좋아 '단'이지 그냥 경찰에게 "형님...형님..."하면서 뒷구멍으로 보호비 걷는 조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이들의 무술 훈련을 보고 권투선수 같다고 하여 "Chinese boxers"라고 불렀다.

사진은 실제 청나라 시대 단원들의 모습.



중국에 진출하고 있던 서양인들에게 가장 반발한 사람들이 바로 이 단원들이었다.

(그럼 만주족에게는 왜 굽신거리냐고 묻고 싶지만 짱개새끼들에게 일관성을 바라면 안되니까 넘어가자)

단원들과 서양인들의 충돌이 심해지면서 서양인들은 청나라 조정에 치외법권 및 중국인 출입금지 지역을 요구했다.

만일 순수하게 서양인들이 상업활동에만 집중하고 청나라 사회에 진입하지 않았더라면 큰 문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중국에 진출한 선교사들이었다.

특히 예수회는 그들이 남미에서 했던 것처럼 군사력을 등에 업고 

중국인의 토지를 사들이며 카톨릭의 이권부터 확보하는 공격적인 선교를 펼쳤다.

한족의 불만은 크게 고조되고 있었고 서양인들과 한족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1899년,

'의화단'으로 불리게 되는 단원들은 선교사들을 살해하고 성당을 불지르는 사태가 벌어진다.


의화단의 난, 영어로는 Boxer Rebellion이라고 한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했으나 청나라 조정을 불신하던 선교사들은 자국의 병력을 요청했다.

이 일이 서태후와 서태후를 따르는 대신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들은 광서제처럼 서양인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했다.

당시 조정이 폭도로 규정했던 의화단원들을 조정의 하부조직처럼 부리면 되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왔고 서태후는 이를 채택한다.

(홍위병을 마음껏 풀어놓은 모택동 같지?)



그리고 청나라 관군은 의화단원들을 단속하지 않고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대로 냅두었다.

의화단원들을 지원한 것도 아니지만 외국인들을 보호한다는 청나라 조정의 의무도 슬그머니 포기한 것이다.



의화단원들은 서태후의 묵인 아래 빠르게 세력을 불려나갔고 서양인들을 기습하여 죽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폭도들이라서 그런지 

총을 휴대한 외국인은 건드리지 않고 비무장한 서양인만 골라 죽였다.

이 당시의 수기에 의하면 고통 없이 죽이는 게 아니라 

녹슨 칼로 난도질하여 참혹하게 죽였다고 한다. (역시 짱개.)

그리고 의화단원들은 외국 공관들까지 포위했다.



모택동이 홍위병들의 폭력성을 과소평가했던 것처럼 

서태후가 간과한 게 있었다면 의화단원들의 걷잡을 수 없는 야만성이었을 것이다.

자국민들이 죽어나가고 심지어 공관까지 포위당하자 

빡친 서양 군대는 중국에 진입하여 직접 폭도들을 진압한다

당황한 서태후는 그제서야 의화단을 진압하라고 명령하지만 이미 늦었다.



서양군대가 베이징으로 진격하자 서태후는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서양 열강들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서태후가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인 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광서제 지지세력이 이것을 기회로 서태후를 몰아내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제일 유력하다.

그리고 의화단원들도 해산 명령을 거부했다.

노조가 외국기업 점령하고 폭력시위하면서 문재인 말 안 듣는 것과 비슷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폭도들 특징이 약자 앞에서는 지옥에서 온 악마군대처럼 행세하는데 진짜 강자가 나타나면 알아서 흩어진다는 것이다.

서양 8개국의 연합군은 우월한 화력을 앞세우고 베이징으로 밀고 들어왔다.

의화단원들은 뿔뿔히 흩어져 민중 속으로 달아났고 서태후도 베이징을 떠나 피신했다.

주인 없는 베이징에서 서양군대는 의화단원을 색출하겠다는 명분 아래 처절한 보복을 했다.

유럽 군대들은 자국민들이 살해당했기 때문에 보복도 심했고 보복 후에는 항상 불을 질러 완전히 파괴하곤 했다.

당시 자금성은 일본군이 점령했는데 일본군은 약탈만 했지 불은 지르지 않았기에 자금성이 지금 그대로 남아있다.



그제서야 숨을 돌린 서태후는 서양 열강들과 화의를 모색했다.

그리고 청나라에게는 굴욕적인 신축조약을 맺고 간산히 서양 군대를 베이징에서 철수시켰다

결국 1년여에 걸친 의화단의 난은 청나라의 똥꼬쇼로 막을 내린다.

양무 운동으로 어떻게든 국력을 다시 키워보려던 청나라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이제 청나라는 사실상의 반식민지 신세가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두가지.

청나라 관료제의 지독한 비효율성

그리고 상황을 읽을 줄 모르는 서태후의 권력욕과 잔대가리였다.



의화단의 난이 '임페리얼 똥꼬쇼'로 막을 내린 결과,

중국인들이 몇천년에 걸쳐 갈고 닦아온 국뽕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황비홍1에서 나오는 유명한 대사 "무술로는 총알을 막을 수 없어~" 그것이 모든 걸 말해준다.

세계의 흐름에 거역해도 '우린 특별하니까' 이 지랄하던 망상이 완벽히 깨어진 것이다.

의화단의 난 이후, 중국은 오히려 민간 차원에서 더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지게 된다.



UFC가 등장하면서 민족무술이라는 새끼들 많이 사라진 걸 느낀다.

뫄한뭐루인지 택껸인지 하여간 트레이닝다운 트레이닝도 안하면서 

모여서 술처먹고 썰이나 푸는 병신들이 많이 사라졌다.

트레이닝에 과학이 등장하면서 근성론도 많이 사라졌다.

그게 순리이다.


의화단은 국뽕에 젖은 한국인의 비열함, 

그리고 서태후는 잔대가리 밖에 발달하지 않은 문재인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대.깨.문 병신들이 그렇게 세계의 흐름에 거역하고 

시대에 뒤쳐진 사회주의 정책으로 얼마나 오래 버티나 보자. 

게다가 서태후가 의화단을 자기 조직처럼 부리려고 하면서 

열강들 신경 긁던 거 보면 문재인이 미국 신경 긁는 것과 존니 비슷하다.

문재인 정권은 앞으로 똥꼬쇼 제대로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루빨리 한국인들이 국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출처: 의화단의 난, 청나라의 똥꼬쇼, 그리고 문재앙 보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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