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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진열장/Fact 모음

조선인들이 처음으로 미국에 가서 일어난 일들

by JiNan's 2019.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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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 2번째 단발한 양복의 동양인은  일본인 통역가)


일본의 윤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으로 암흑시대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조선은

일본의 번영함을 보고 정신적 충격을받고 일본의 신사유람단과 비슷한 성격의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파견했다.

이들을 "보빙사"라고 부른다


(샌프란시스코 1890)


보빙사 수행단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면서부터 미국의 번화한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조선 사절단의 울긋불긋하고 화려한 색체의 기이한 옷차림에 놀랐다

23년 전에 77명이나 몰려왔던 일본 사절단의 옷차림과는 완전히 대조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신문은 특히 조선사절단의 복장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화려한 색채를 띤 정교한 무늬의 긴 도포는 극히 환상적이고 기이하게 보였다."



사절단은 샌프란시스코 팔레스 호텔에서 묵었는데 

엘리베이터가 뭔 줄 모르고 탔다가 흔들리며 올라가자 비명을 지르며 기겁했다. 

그러나 곧 어떤 기능을 하는 건 줄 알아차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애써 태연한척 하기도 했다.


일행은 미국인들의 다양한 생김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사절단 중 한 사람이 신문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 놀랍도록 아름다운 부인들과 건장한 체구에 총명한 얼굴을 한 신사들,

그리고 대단히 흰 셔츠를 입고 눈은 사람의 눈 같지 않게 흰 흑인들을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9.15  워싱턴에 도착하여 국무차관보 데이비스를 만나 해군정보국의 메이슨 중위와 포크 소위를 소개받는다. 

메이슨 중위와 포크 소위는 사절단이 돌아갈 때까지 영접 임무를 받았다.

이들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일일이 배려하고 안내했다.


9.18 뉴욕에 미국 제21대 대통령이 있는 제5번가 호텔에 투숙하였다. 

이곳에서 미 대통령과 조선사절단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사절단은 미 대통령 체스터 아더가 기다리고 있는 호텔 귀빈실로 향했다.


호텔의 귀빈실 중앙에 아더 대통령이 서 있고 오른쪽엔 푸렐링 휘센 국무장관, 

왼쪽엔 데이비스 국무차관보가 나란히 서 있었다. 

한 발자국 뒤로 츄 국무성 관리, 메이슨 중위, 포크 소위 기타 수명의 인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홀에 들어서기 전 일행은 복도에서 이마에 손을 대고 한 번 깊이 허리를 굽히며 읍을 했다. 

그러곤 민영익 대사, 홍영식 부사, 서광범 비서관, 로웰 외무서기관과 함께 다른 5명의 수행원이 한 줄로 들어섰다.


접견실 문 밖의 넓은 홀에 이르자 사절단 일행은 대통령을 향해 옆으로 일렬로 섰다.

아더 대통령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악수를 청하려 할 때였다.

민영익이 신호를 하자, 일제히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머리 위로 올린 다음 

이마가 마룻바닥에 닿을 때까지 천천히 몸을 굽혀 절을 했다. 

이런 자세로 얼마 있은 다음에 몸을 일으켜 방안으로 들어갔다.


미국에서는 왕이 없었고 신분이 평등하므로 모두가 악수로 인사했기때문에 아더 대통령이 몹시 당황해했다.



사신 민영익 홍영식 등은 대 아메리카 합중국 대 빅니새쳔덕(大 伯理璽天德:프레지던트)게 아뢰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미국 왕의 이름이 프레지던트인 줄 알았다.)사신 등이 

"대조선국 대군주 흠명을 받자와 대신으로 대 백니새쳔덕과 

미합중국 모든 인민이 한가지로 안녕함을 누리시기를 청하오며, 

또 두 나라 인민이 서로 사귀고 좋아하는 우의에 확실한 뜻을 고하여, 

피차 돈밀함을 생각하와 실상으로 서로 지킴을 정하여 길이 무궁한 복이 되기를 바라나이다.

 받들어 온 바 국서 두 봉의 하나는 우리 대군주께옵서

대 백니새쳔덕께 회답하심이요, 

하나는 소신의 정권빙거로니 삼가 바침을 아뢰옵나이다.”




배석했던 미야오카 쓰네지로가 이를 일본어로 통역했고, 일본어를 아는 로웰이 다시 영어로 통역했다.


미 대통령의 답사가 끝나자 대통령과 사절단은 다시 악수를 나누었다. 

접견이 끝나고 접견실 문 밖을 나갈 때 사절단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처음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했다.



9.24 뉴욕으로 돌아왔다.


뉴욕에선 뉴욕 병원 - 웨스턴 유니언 전신회사 - 소방서 - 우체국 - 티파니 상점 

- 크램프 독스(Docks) - 하버마이어 제당 공장 - 이브닝 포스트와 뉴욕헤랄드 신문사 

- 부르클린 해군 기지 -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였다. 

사절단은 쉴 사이 없이 여기저기를 다녔다.


전기회사를 방문했을 때였다.

서광범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언가 적고 다니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안내자에게 질문하였다.



“그렇다면 전기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5분이 넘도록 열심히 설명했지만 용어에서부터 개념까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9.26 사절단 일행이 뉴욕의 신문사 시찰을 마치고 건물을 나설 때였다.

거리엔 신기한 옷차림의 이방인을 보려고 몰려든 구경꾼들로 가득 찼다. 

경관들은 마차에 올라타려는 사절단 일행을 위해 인파를 헤쳐 가며 길을 터주기에 진땀을 흘렸다.


이때였다. 마차에 올라탄 최경석을 보고 군중 속에서 누군가 그의 모자(갓)에 대해 뭔가 소리쳤다. 다음 순간 수백 명이 합창하듯 그 말을 따라 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최경석은 자기가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최경석의 얼굴은 분노로 타올랐다.

(쒸익.. 쒸익..)


그는 자리에서 몸을 바로 세운 다음 노기 어린 얼굴로 군중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 사이는 많이 벌어져 있고 깊이 패인 검은 눈은 마치 분노로 붉게 타오른 두 석탄알처럼 빛났다. 

그러자 마차 바로 곁에 몰려 있던 구경꾼들이 위세에 눌려 숨을 죽였다. 


동양의 가장 못사는 야만국 사람이 체면과 자존심은 세계 최고인지라 노려보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9.28 오후엔 민영익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때마침 그의 뒤를 따라온 마차 속에는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민영익을 본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뭔가 놀리는 듯 했다.

그러나 민영익은 조용히 몸을 돌려 그들에게 나직이 눈인사를 했다.

그러자 당황해진 아이들은 단숨에 조용해졌다.



10.12 사절단, 미 대통령을 다시 예방하여 고별인사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아더 대통령은 민영익이 2명의 수행원(서광범, 변수), 

포크 소위와 함께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를 거쳐 동양으로 향해 떠나는 트렌튼 호를 타고 

조선에 귀국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 주었다.


사절단은 유길준에게 미국에 남아 보스턴에서 공부하게 하고 

나머지 인원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귀국하기로 하였다.


10.16 홍영식 일행은 워싱턴을 떠나 10.23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홍영식 일행은 퍼시벌 로웰, 최경석, 고영철, 현광택, 우리탕, 미야오까 쓰네지로와 함께 총 7명이었다.


11.10 민영익 일행은 트렌튼 호를 타고 뉴욕을 떠났다.



12.20 트렌튼 호는 프랑스 마르세이유 도착하였고, 민영익 일행은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을 돌아보았다.

12.20 홍영식 일행은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여 12.21 고종에게 복명하였다.


1884.1.25. 민영익 일행은 영국, 프랑스 방문을 마치고 마르세이유로 돌아왔다.

트렌튼 호는 이집트 카이로 - 인도 - 실론 - 싱가폴 - 홍콩 - 나가사끼를 경유하여 조선으로 입항하였다.

트렌트 호 함장은 피디안 대령이었다.


서광범, 변수는 포크 소위가 번역해 주는 각종 자료, 특히 세계의 정치사 및 문화사에 관한 정보들을 기록하는데 분주했다.


그러나 민영익은 묵묵히 ‘공자의 책’들을 읽기만 했다.



6.2. 민영익 일행이 서울에 도착했다.

6.3 민영익, 푸트 주한 미 공사를 방문하여 털어놓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 광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 나는 내가 갈 길을 분명하게 내다볼 수가 없으나 멀지 않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서광범은 민영익이 앞으로 보수 세력에 가담할 우려가 크다고 포크 소위에게 토로하였다. 

서광범의 우려대로 민영익은 개화파에 가담하지 않고 오히려 보수파의 주동 세력이 되었다.


6.9 민영익과 서광범이 고종에게 복명하였다





<조선보빙사, 그 후의 행적>


<민영익, 뉴욕 메디슨 스퀘어가든의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민영익, 귀국 후 요직을 거치다가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을 맞아 개화당에게 온몸에 자상을 입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후 지리국 총판, 군무국 총판, 한성부 판윤,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고종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홍콩, 상해 등지로 망명하였고, 

그 후 일시 귀국하였으나 을사조약 이후 다시 상해로 망명,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홍영식, 워싱턴 펜실바니아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홍영식, 귀국후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84년 조선에 우편제도를 창설하라는 어명을 받아 우정국을 설치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과 함께 좌의정에 올랐으나 정변이 실패하자 사대당에 의해 살해되었다.


<서광범, 워싱턴 펜실바니아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서광범, 갑신정변 후 10년 동안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귀국하여 법무대신에까지 올랐다. 

1896년 주미공사가 되어 워싱톤으로 부임했다가 국내 정세가 변하여 1년 만에 면직되었다. 

그러자 공금 4500달러를 챙겨가지고 도주하여 워싱톤에 집 한 채를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1897년 갑작스런 병으로 죽었다.


최경석, 1884년 실설된 농무 목축 시험장의 책임자로 

농기구 개량, 농업 발전에 힘썼으나 1886년 병으로 죽었다. 

그가 죽자 농업 시험장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유길준,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다가 조선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1885년 유럽을 경유하여 귀국, 돌아오자마자 개화당으로 몰려 체포되어 

한규설의 집에 연금 당하였다. 

이때 <서유견문>을 탈고하였다. 

1896년 내부대신을 역임하고, 한일합병 때는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사퇴하였다.



변수,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 

1886년 2월에 다른 두 사람과 공모하여 민영익의 돈 몇 천 냥인가를 빼돌려 미국으로 도망갔다. 

미국에서 메릴랜드 농과대학에 입학하고 

1891년 졸업하여 미국 농무성에서 근무하다 철도 사고로 죽었다. 

그의 행적은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으나 최근 미국 메릴랜드 농과대학 자료에서 밝혀졌다.



고종은 갑신정변이라는 위기를 넘기고 

입헌군주제와 입헌공화제를 사악한 정치형태라고 규정하고

전제 독재 정치에 열중한다.


출처: 조선인들이 처음으로 미국에 가서 일어난 일들 (서유견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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