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500년의 세월동안,
일본이나 중국에 있던 물방아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자력으로 3단 수차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방앗간에서 쓰이던 바퀴 하나짜리 수차는 참고로 있었는데
방앗간의 물레방아는 수력으로 곡식을 빻는데 사용하였다.
3단 수차는 일본의 오사카성에 설치되어있는데
오사카 성 같이 주변에 지대가 높은 곳으로 용수를 끌어오기 위해서 쓰였다.
논에 물을 댈때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물을 퍼올릴때 쓰여서 아주 중요한 관개시설인 것이다.
일단 조선 왕조 실록을 보면
1429 세종 11년 12월 3일 일본의 물레방아가 굉장하다고 보고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통신사만 일본 방문)까지는
일본에서는 조선에 국왕사를 보내고 조선은 통신사를 보냈는데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의 3단 수차가 대단하다고 세종대왕에게 보고하였다.
1430 세종 12년 9월 27일 물레방아를 만들려고 한다
세종대왕이 3단 수차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만들지 못하였다.
1431 세종 13년 5월 17일
'중국이나 일본도 물레방아의 이익을 얻고 있지만 우리 조선에는 그것이 없다'라고 기술.
1431 세종 13년 12월 25일 물레방아 도입을 시도한다.
중국이나 일본으로 부터 3단 수차를 도입하려고 하지만 역시 실패 한다.
1451 문종 원년 11월 18일 20년에 걸친 물레방아의 도입 실패.
그후 세종의 아들인 문종때에 세종때 실패한 수차를 도입하려고 했지만 역시나 실패
1546 명종 원년 2월 1일 물레방아 도입의 시도. 류큐(오키나와)와 중국으로부터 복건식 물레방아를 수입한다.
연산군과 성종때 조정에서 3단 수차를 도입하려고 하지만 실패했고
세종때로부터 100년이 훌쩍 지난 뒤인 명종왕때 류쿠와 명에서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백년간 물레방아에 대한 기록이 없고,
1764 1763-64년의 조선 통신사「일동장유가」(정성(淀城)의 물깃기를 통해 물레방아의 감상)
18세기 조선통신사의 기록인 일동장유가에 일본의 3단 수차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구조의 교묘함은 본받아 만들고 싶을 정도다.'라고 기술하였다.
1880년대가 되어 김홍집이 기록한것에 따르면
조선에는 관개시설이 없고 물레방아 조차도 없다고 탄식하는 기록이 있다.
즉, 세종의 사신으로 일본에 통신사로 간
박단생이 1429년에 일본에서 3단 물레방아를 보고와서
조선 조정에서 수백년간 도입하려고 했지만
구한말인 19세기 후반에도 3단 물레방아인 수차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입은 했으나 자력으로 만드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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