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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진열장/대한민국

백범 김구는 건국을 왜 반대했을까?

by JiNan's 2018.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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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게이드라

비오는 주말 편안한 일베를 잘 즐기고 있노?


구글 검색하다 재밌는 자료가 있길래 정리해서 올려본다


너희 일게이들은 김구에 대해 어떻게 배웠노?

대한민국 건국에 힘쓴 위인? 독립운동에 인생을 바친 위인?


내가 가져온 자료는 '백범 김구가 건국을 반대한 이유'에 대해서 작성할 예정이야

최대한 게이들이 읽기 편하게 정리해서 작성할테니 재밌게 읽어주길 바래



우리 대한민국은 독립을 위해 한 몸바친 수많은 위인들이 있어

그중 중고등 교육에 꼭 나오는 위인이 백범 김구 선생이지


그런데 이런 위대한 위인이 남한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일화를 알고 있노?



성시백


한반도의 비극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 간첩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성시백이라는 인물이 있어

이 성시백이라는 인물은 김일성의 부인이 차린 밥상을 먹을 정도로 김일성이 아끼는 특급 간첩 1호라는 말까지 있지


특히 이 성시백이 김구를 평양으로 가게 하는데 핵심적인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어


김구가 평양을 갔을 당시 '북한 노동신문'에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어


"성시백 동지는 *남북련석회의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극단한 반동분자로 있던 김구 선생을 돌려세우는 사업체에도 큰 힘을 넣었다."(북한 노동신문)


(*여기서 남북련석회의란 남북협상을 뜻함)



요약

느그 자랑스러운 김구선생 우리가 포섭했당께?

맞아 이렇게 대한민국의 위인 김구가 빨갱이들에게 포섭당했다는거야



사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세력이었던 김구는 

47년 12월 초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건국에 매우 협조적이었어

심지어 김구가 말하길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결국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이다." 라고 할 정도로 협조적이었지


또한 48년 1월 25일에도 

"유엔 감시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 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라고 

총선 참여 의사도 명확했어



근데 왠걸?

다음날 1월 26일 김구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하는데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재 상태로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으므로 

두 나라 군대가 철수한 후 총선거를 해서 통일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라고 대못을 박아버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심세력이었던 김구의 이런 발언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겐 충격발언이었지



비유하자면 여태 북한 똥꼬 오지게 빨던 좆재인이가

"니미 시벌 부칸 빨갱이 새끼들이랑 앞으로 손절~!" 이라고 말한거랑 똑같은 거임



또한 김구의 이러한 돌발 발언 4일전인 1월 22일 소련의 주 UN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한다"는 성명도 발표하게되지


아무튼 남한의 주요 정치 지도자인 김구의 총선 반대 발언과 소련 측의 입북 반대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임무 수행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

"유엔으로 돌아가 다시 *훈령을 받아 활동 방향을 정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해

(*훈령뜻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6240&cid=40942&categoryId=31721 )



이렇게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철수하면 당연히 누가 좋겠노?

빨갱이들 본격적인 작전 시작 아니겠노


아무튼 유엔 감시하의 총선이 가시화되자 월북하여 평양에 있던 빨갱이 *박헌영이란 인물이

남한의 선거를 폭력 수단을 동원하여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평양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남로당에게 지령을 떄려


(*박헌영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97%8C%EC%98%81 )


여윽시 빨갱이 홍어새끼들은 폭력이 우선이노



저때 성호스님이 계셨더라면 저놈들 다죽었겠지?

- 빨갱이는 죽여도 돼. - 성호스님 -



이렇게 빨갱이 박헌영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은 48년 2월 7일부터 2주 동안 전국에 걸쳐


"유엔위원단 반대", "남조선 단정 반대", "미소 양군 동시 철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 반동분자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극렬 폭력 시위를 벌이게 돼



특히 제주도에서는 '인민해방군' 이라 불리는 남로당원들이 일분군이 남겨놓고 간 소총과 수류탄, 검등으로 무장하고 경찰서를 공격했고,


경찰 및 우익 청년단체를 대상으로 유격전을 벌였어, 이때 남로당의 거센 테러로 제주도는 통제 불능 상황으로 치달았다고 해


이게 바로 우리가 잘 알고있는 제주 4.3사건의 발단이 돼

(제주 4.3사건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EC%A3%BC_4%C2%B73_%EC%82%AC%EA%B1%B4)



전국 각지에서 이런 극렬 폭력 시위 및 혼란이 야기 되는 와중에도 2월 10일 김구는 충격적인 한마디를 더 하게 되는데...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하지 않겠다!"

라고 건국을 위한 고난의 행보에 재를 뿌려버려



그러나 유엔은 한발짝만 더가면 한반도가 적화의 위기에 몰릴걸 내다 봤는지

소총회를 열어 2월 26일, "유엔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안"을 통과시켜버리지


이때부터 김구와 또다른 핵심 독립 운동가 김규식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데



남북의 분단을 막기위해 북측에 남북협상을 제안해

당연히 이러한 제안에 나이스를 외친 나라는 소련이었어

당시 반탁을 주장하며 소련 노선에 정반대 입장을 취했던 김구가 북행하면 결과적으로 소련 노선을 정당화 하는 샘이었거든


물론 소련과 북한은 남북협상을 북한 공산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당시 평양 주둔 소련군정 민정사령관(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의 일기 형식의 비망록에 의하면


레베데프는 직속상관인 슈티코프 연해주관구 군사정치위원의 지시 하에 

남북협상에 참석하는 남측 초청 대상자 선정에서부터 대표자 연석회의 일정과 절차, 회의 참석자들의 발언순서 등 

모든 사항을 자신이 각본을 짜서 지휘했다고 밝히고 있어


(레베데프 비망록 관련 링크 : http://egloos.zum.com/botw/v/11138063 )



당시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이 채택되어 있었고, 레베데프 비망록에 의하면


만약 김구나 김규식이 말을 잘 듣지 않을 경우에 대한 대비책 또한 세워놨다고 기록되어 있어


"김구와 그의 측근들이 회의를 파탄시키고 퇴장하면 어떻게 하나. '나가라'고 하며 그들을 미국 간첩으로 몰자.

그리고 회의는 계속한다. 김구와의 대화를 계속한다. 

...그들이 소란을 피우면 이 대회는 총선을 반대하는 것인데 왜 퇴장하느냐고 몰아붙일 것."


등으로 야비한 작전까지 치밀하게 세워 놨다고 해


(위에 대한 내용을 확인하고 싶다면 http://egloos.zum.com/botw/v/11138063 이 링크(위 링크와 동일) 에서 

첫 문단이 끝나는 부분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남북협상에 임한 소련 군정은 김구와 김규식 일행을 회유하기 위해

김일성을 통해 두 사람에게 직위를 부여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 통과된 후 통일정부를 세울 것, 이라고 제의 했다고 해


한마디로 "우리 헌법이 통과되면 분단하지 말고 사이좋게 통일정부 세워서 나라만들장께?"



근데 여기서 김구는 아는지 모르는지 48년 5월 3일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

"만일 미국인들이 나를 탄압한다면 북한에서 나에게 정치적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는가?"라고 월북 의사를 타진하게 되지


그리고 5.10 선거가 성공적으로 실시된 후에도 김구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는 노력은 계속되는데

48년 8월 초, 통일독립촉진회의 대표단을 파리 유엔총회에 파견하여 

대한민국 정권을 승인하지 말고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고 호소하려는 시도도 했다고 해

(통일독립촉진회 관련 링크 : http://news.joins.com/article/2659972 )


또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선포되기 전날, 김구는 기자들로부터 정부수립에관한 논평을 요청받게 되는데

당시 김구는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다"라는 부정적 논평을 내놓게되지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던 두 기둥, 우익진영의 인물이었던 김구와 김규식의 충격적인 이러한 행보들로 인해 

국내 우익진영은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우익진영은 초전박살이 나게 되는데 단일정부를 부정하는 쪽, 아닌 쪽으로 분열이 나게 되었어

반대로 단선 반대를 주장하는 남로당 및 빨갱이들의 주장에는 엄청난 힘을 보태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돼어버려



해방 공간에서 활동했던 허정은 자신의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에서 

이승만의 건국 노선과 김구의 건국 반대, 남북협상 노선에 이런 평을 남겨


'요즘도 간혹 백범(김구)의 노선에 따랐더라면, 

남북 분단의 장기화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결국은 어떠한 형태로든 통일정부가 수립되었을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입장을 말한다면 당시 정세로 보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최선의 길이었다. 

그때 만일 남한에 민주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의 공산화는 필연적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굳게 믿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남북 분단의 비극을 막기 위해 

우선 어떤 형태로든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민주주의냐 또는 공산주의냐 하는 

이데올로기의 선택은 그 다음으로 미루어 민의(民意)에 맡기거나, 

또는 민주 진영과 공산당의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최선의 길처럼 생각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시기의 늦고 빠름은 있더라도 공산화라는 결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2차 대전후의 동구 제국이 보여준 역사적 교훈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백범이 추구하던 노선이었다. 

당시의 현실을 괄호 속에 묶어두고 이상만을 앞세운다면 분명히 이것은 최선의 길이었을 것이다.'


(허정 : https://ko.wikipedia.org/wiki/%ED%97%88%EC%A0%95 )


즉, 허정은 김구를 현실을 외면한 채 이상만을 추구하려는 인간으로 평했어

당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남한 단독정부의 소망은 통일정부 수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민주적 통일정부의 수립"에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지




당시 8.15 해방이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가져오기는커녕 국토 분단과 외국의 군사점령이라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흐르자

우남(이승만)은 조속한 시일 내에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안하고, 남북 통일정부 수립이 어려우면

남한에서만이라도 빨리 주권을 회복하여 정부가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통일을 추진할 것을 역설하게 돼

이러한 주장을 펼치면서 이승만은 이렇게 외치는데,


"우리가 독립운동을 한다고 40여 년 동안 국제회의마다 애걸하고 다녔다. 우리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주시오, 우리 말 좀 들어주시오, 이렇게 애걸복걸하고 다녔다. 그래도 독립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지금 5.10 총선거를 치르면 반쪽 독립이지만 조선은 독립한다.


반쪽이 아니라 제주도에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 주권을 갖게 되면 국제무대에서 우리의 주장을 펼칠 수 있지 않느냐? 그런데 이 권리를 통일이란 꿈을 위해서 평양에 가는 것으로 대신 하고 포기하려 하는가? 당신들이나 하시오. 역사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겠소!"


과연 일게이들 생각에는 위 이승만의 주장에 대해 어떤 생각이노?

과연 김구, 김규식이 주장하는 통일우선주의가 최선이었을까, 아니면 이승만의 단독정부주의가 최선이었을까?




당시 48년 7월 11일, 자유중국의 유어만 주 서울 총영사는 

비밀리에 김구와 만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지지하기 바란다"는 장제스 총통의 뜻을 김구에게 전하고,

김구에게 왜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하는지를 묻게되는데 김구는 유어만에게 자신의 속내를 다음과 같이 털어놓게돼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간 조선인 붉은 군대의 확장을 중지하고, 

그 사이에 남한이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공산군의 현재 병력만한 군대를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러시아인들이 손쉽게 남쪽을 기습할 것이며, 당장 남한에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김구, 유어만 대화 비망록 : http://egloos.zum.com/botw/v/11176474 )


라고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는데 한마디로 

조만간 북한이 남침하여 공산정권을 세울 것이 분명하니 굳이 대한민국을 건국할 필요가 없다고한셈이야.


물론 실제로 2년 뒤인 50년 6월 25일 실제 북한의 남침이 이루어져 한반도의 비극이 시작됐지

만약 이러한 속마음을 이승만과 공유했더라면 6.25라는 참사가 발생했을까? 사실이라면 김구는 왜 이러한 내용을 공유하지 않았을까?




여기서 김구의 종잡을 수 없는 건국 반대 행보에 제기되는 주장중 하나는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 성시백에게 포섭 당했기 때문이란 주장이 있어


김구의 추종자였던 조경한은 


"서영해가 나타나 '남북한을 통틀어 총선거를 하면 선생님이 대통령이 되실 텐데 

무엇하러 이승만이 주도하는 남한만의 선거에 참여하려 하십니까.

김일성도 김구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라고 집요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변심하게 되었다는 증언이 있어 

(이호,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하), 도서 출판 복의 근원, 2013, 210쪽).


아무튼 빨갱이 성시백은 *국회 프락치 사건의 배후 인물로서 1949년 5월 15일 체포되어 6.25 남침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처형 되었어.

(* 국회 프락치 사건 : https://ko.wikipedia.org/wiki/%EA%B5%AD%ED%9A%8C_%ED%94%84%EB%9D%BD%EC%B9%98_%EC%82%AC%EA%B1%B4)




흥미로운 것은 북한 노동신문 1997년 5월 26일자에 성시백의 김구 공작에 대해 인정하는 특집보도를 게재하게 돼


(북한 노동신문 1997년 5월 26일 관련 링크 : http://www.allinkorea.net/sub_read.html?uid=22229 )




백범 김구의 건국 반대와 행동들 그리고 우남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및 발언들을

게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노?


감히 이러한 위인들을 내가 평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만

그저 빨갱이들에게서 지켜주신 우남 이승만 전 대통령님께 다시 한 번 감사 할 뿐이다.



(위의 내용들은 아래 링크글을 통해 보기 편하게 정리하였고, 

일부 내용들의 팩트를 제공하기 위해 중간중간 뒷바침 내용 링크도 달아놨다.

보기 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읽어줘서 고맙고 일요일 잘 보내길 바래~ )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636







3줄요약

1.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했다.

2. 반대 이유 중 빨갱이에게 포섭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3. 빨갱이 개새끼들


출처: (스압)백범 김구는 왜 건국을 반대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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